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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해 바라본 역사 속에 잊혀져야했던 인물들
 


우리에게 뜻깊은 날이었던 71번째 광복절이 지나갔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어느 시대든 뛰어난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었지만, 나라가 힘들 때 등장한 뛰어난 사람은 ‘영웅’으로 후대에 더욱 깊게 각인됩니다. 예컨대, 임진왜란을 겪을 때 등장하신 이순신 장군이나 일제에 항거한 안중근 장군 등이 그런 '민족의 영웅'이죠.


 

생각해봅시다. 영웅이 영웅일 수 있는 건 그 모두가 그들처럼 할 수 없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요? 빛이 있는 곳엔 항상 그늘도 존재하듯, 영웅의 그늘 아래 잊혀져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든 말이죠.

전교 1등만이 학생인 것이 아니듯, 자랑스럽지 못한 인물과 역사 또한 우리가 안고 가야할 역사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토대로, 이번에는 '14년 말엽에 개막했던 뮤지컬<나는 너다>와 현재 상영 중인 영화<덕혜옹주>를 통해 역사 속에서 잊혀진 두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려합니다.
'예술을 통해 바라본 역사 속에 잊혀져야 했던 인물들’, 이제 첫 번째 막을 걷어보겠습니다.
 

[<나는 너다>. 안중근 그리고 그의 차남 안준생]
 


 

<나는 너다>는 ‘삼둥이 아빠’로 더 유명한 배우 송일국씨가 안중근과 그의 차남 안준생 1인 2역을 연기한 뮤지컬입니다. 해당 뮤지컬이 더욱 특별한 것은 종래의 예술계에서 존재하던 우리의 영웅 안중근을 다룬 것이 아닌, 그의 차남 안준생과 준생의 인간적 고뇌에 포커스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안준생에 관해서 아시는 분은 많지 않으실 건데요, 그도 그럴것이 그에 관한 자세한 사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알려진 대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그는 상해에서 머물며 사업을 하다가 1939년 한국을 방문한 후,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를 봉안해 놓았던 박문사에서 이토의 아들에게 아버지 안중근의 거사를 사죄했다고 알려진 인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를 친일파로 기억하며, 백범 김구에 의한 피살 위협도 받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작게는 아버지 안중근의, 크게는 우리 역사의 수치라고 기억하는 그를, <나는 너다>에서는 준생의 인간적인 입장에서 얘기하며 보는 이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아버지가 영웅이면 자식도 영웅이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언뜻 생각해보았을 땐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의로운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안준생이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극에서 준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의 아버지가 국가에서는 영웅이었지만, 가정에서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도망자였고, 언제나 일본을 피해 숨어야했다. 집안에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은 물론이었다.” 상기의 메시지와 더불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절규합니다. “나의 삶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은 없었습니다. (안중근의 아들이라)아무데서도 날 받아주지 않았고, 당장에 먹을 것이 없었으며, 추워도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빌어먹을지언정 난 그저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대신해 머리를 조아리고 돈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잘못입니까. 난 그저 나의 아버지가 그랬듯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준생의 행위가 목적론적 윤리로 보았을 때 의(義)가 아니기에 우린 그의 행위를 친일이라 얘기하며, 역사의 수치로 기억하여 애써 묻어두었습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우리가 ‘준생’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요. ‘그래도 난 의롭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며 선뜻 답을 내리고 있는 분이 계신다면 다른 예를 들어 다시 질문해보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살고 있었나, 그럴 용기가 진정으로 우리에겐 있었나’ 하는 질문입니다.


 

청년실업이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문제인 요즘, 우리네 청춘들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삶을 살았었나요? 그저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혹은 남들처럼이라도 먹고 살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공부하거나 취업하지 않았나요? 국가적인 문제든, 자신 주변의 문제든, 분명 어떤 선택이 옳은가를 머리로는 알면서도 현실과 타협하며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 했던 적은 정말 없었나요?
자,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가 ‘준생’이라면, 쉽사리 아버지와 같은 의로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덕혜옹주> 그리고 ‘영웅’]


 <출처: 덕혜공주 공식 포스터 ⓒ네이버 영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는 그 이름대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를 다뤘으며, 뛰어난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으로 최근 많은 관심을 받고있습니다.


덕혜옹주는 을사오적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된 시기에 황실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물입니다. 당시의 국가적 상황으로 인해 일본으로 가야 했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37년이나 걸린, 그마저도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돌아온 기구한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본 영화에서는 그런 그녀의 내면을 보여주려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황실의 자손이기에 그녀의 유년시절이 일반 백성들처럼 육체적으로 힘들지는 않았을겁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더 많은 제약을 받았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린나이에 가야했던 유학도, 일본인과의 결혼도 그녀의 선택사항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 그녀가 광복 후에도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는 대한민국 신정부의 입국거부 조치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정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제 막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민주주의를 선택한 시점에서 황족의 복귀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우려했던 게 그녀가 광복 후에도 바로 돌아오지 못했던 원인일 거라 추정합니다. 본 영화에서는 덕혜옹주역을 맡은 손예진씨가 그에 해당하는 씬에서 실성한 듯 바닥을 뒹굴며 웃는 모습은 덕혜‘옹주’가 아닌 인간 ‘이덕혜’의 내면을 보여주고, 관객들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 합니다.
 
최근 본 영화가 받고있는 많은 관심만큼이나 논란이 되는 것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극의 초반에서 그녀는 나름의 방식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용기가 뛰어난 ‘투사’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일부 해당 장면은 픽션으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영화에만 존재하는 사건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논란은 별개로, 저는 감독이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까지는 몰라도 영화를 통해 그녀가 ‘영웅’이었길 바랐으며, 그를 전하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주지 못했어요”라는 영화 종반부 덕혜옹주의 대사는 그런 제 생각을 굳혀주었습니다. 더불어, 영화의 일부 리뷰에서는 덕혜옹주와 유관순을 비교하며 무능한 지도층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덕혜옹주가 ‘영웅’이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고종황제와 유년시절 덕혜옹주가 기거했던 ‘덕수궁’의 전경 - 서울특별시 중구 소재)

 

독은 왜 그런 대사를 넣었을까요? (실제로 덕혜옹주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왜 그녀는 사람들의 희망 이었어야하고, 왜 그런 부담을 갖아야하는 건가요? 왜 그녀가 영웅이기를 바라는 걸까요? 그녀가 황족이라는 이유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학창시절 배웠던 역사를 떠올려봅시다. 그녀의 아버지 고종황제가 왕위를 이은 것이 종래의 왕위계승 방식대로 왕가의 적장자였었기 때문이었나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를 주도한 왕이었던가요? 그 역시 우린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의 아래 있던 모든 대신들이 고종을 중심으로 뭉쳐 열심히 구국을 위해 싸웠던가요? 을사오적이 있는 것을 보니 그 역시도 아니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한 나라의 왕 역시 자신의 뜻을 대놓고 펼쳐보일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도 후궁의 늦둥이 딸로 나온 덕혜옹주가 그녀의 자리에서 일제국과 싸울 수 있던 능력이 있었을까요? 두 번 생각할 이유없이 답은 ‘아니다’ 일 것입니다. 오히려, 황손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감시과 제약을 받아서 일반 백성들처럼 일본과 싸우기 위한 시도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황손이기 때문에 억지로 간 일본에서 돌아오지도 못한, 쉽게 말해 일정기간동안 조국이 버린 사람이었음에도, 그녀가 꼭 우리를 위한 ‘영웅’이 되려 노력해야했다며 요구하는게 정당한가요?
황손이 된 것이 선택이 아닌 것처럼, 그녀의 삶도 그녀가 선택할 수는 없는 걸까요?
 


[왜 우리는 그들을 ‘애써서’ 기억하려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의 역사에서 우린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을 기억합니다. 한 부류는 영웅이고, 다른 한 부류는 정반대 위치의 악인입니다. 영웅을 보며 교훈을 얻고, 악인을 잊지않고 상기하며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뮤지컬 <나는 너다>와 영화<덕혜옹주>를 빌어 안준생과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해봤는데요, 지난 시간동안 우린 그들에 대해서 배우지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우리 역사에서 기억할만큼 뛰어난 영웅이지 못했다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단순히 배울 것이 너무나 많아서, 특별한 임팩트가 없어서 상기의 두 인물과 같은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나무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영웅의 그늘아래 부끄러워서 기억하려하기 싫어하는 것이라면 재고해야 합니다. 또한, 영웅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삶은 고려하지 않은 채 우리의 수치라고 매도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하고싶습니다.



[1등만을 기억한다며 욕하는 우리가 영웅만을 바라는 후손은 아니었나]

 

 

모두가 슈퍼맨과 배트맨처럼 세상을 산다면 그들은 히어로물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보며 열광하는 이유, 우리네 민족 영웅들을 칭송하며 기리는 이유는 그들이 평범한 사람들은 하기 어려운 선택과 희생을 감내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특별한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웅은 물론, 영웅의 자손들, 지도자의 핏줄도 결국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들을 기억하진 못할지언정, 그들도 인간이기에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바랐던 것이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닐까요.


예전에 모 개그프로그램에서 나온 ‘1등만을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선조들은 반드시 영웅이어야 한다고 지나치게 요구했던 것 은 아닌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과거이지만, 우리 역시 후손들에게 과거로 기억되며 같은 잣대로 평가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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