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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3 – 민족자본 개성전기의 탄생


대한제국은 망했다. 일찍부터 ‘꺼지지 않는 불’ 전깃불에 관심을 보여 당시로서는 최신 발명품이던 전등을 궁궐에 매달았던 고종은 ‘태황제’에서 ‘태왕’으로 격하돼 덕수궁에 유폐되다시피 했고 마지막 왕 순종은 무기력한 삶을 이어갔다. 


황제의 내탕금까지 퍼부어가며 일으켜 보려던 전기 산업은 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새로운 주인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이를테면 당시 한국 유일의 전기사업체였던 ‘한미전기회사’는 일제 강점 이전에 이미 일본측에 넘어가 ‘일한와사전기’(日韓瓦斯電氣)로 바뀌어 있었다. (이후 1915년 경성전기로 개칭)



‘경성전기’는 서울 뿐 아니라 경남 일원과 경기 강원 일대의 전력까지 공급하며 몸집을 불렸고 부산지역에는 ‘조선와사’가 설립돼 부산 지역의 전기 생산을 도맡았고 대구와 함흥 지역에 각각 설립된 대구전기와 함흥전기는 합병하여 ‘대흥전기’라 불리우며 해당 지역의 전기 사업을 펼쳐 나갔다. 원산에는 최초로 수력발전소가 생겼고 (1912) 지하자원이 집중된 한국 북부 지역의 원활한 개발을 위해 많은 발전소가 생겨났다. 


이 잡다한 전기회사들은 거의 모두가 일본인들의 주도에 의해 만들어졌고 일본인들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운영됐다. 서울 거리 하나만 예를 들면 일본인들의 거리라 할 오늘날의 명동 일대는 대낮같이 훤했지만 청계천 넘어 왕년의 ‘북촌’ 즉, 옛 조선의 대로였던 종로통은 어두컴컴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종로 일대의 모습 / 출처 : 위키백과>


‘남촌’ 즉 일본인들의 동네는 풍부한 전기를 향유하는 술집 등 유흥시설, 축음기가 울리는 다방, 영사기가 돌아가며 변사가 열을 올리는 극장 등 시설이 줄을 지어 세워졌지만 조선인들이 상권을 쥐고 버티던 종로통은 전기의 혜택을 그다지 입지 못했다. 오죽하면 일제시대 유명한 여류 화가였던 나혜석이 “내가 경성 시장이 된다면 조선인 시가지도 일본인들의 거주지인 본정통 (오늘날의 명동)처럼 전기 시설을 마련하겠다.”고 얘기했을까. 


조선 상인들은 종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1916년 열기 시작한 야시장도 그 중의 하나였다. 여름에만 하다가 상설시장으로 변했던 종로의 야시장은 온갖 품목이 집결한 일제 강점기판 ‘도깨비 시장’이었지만 그래도 가로등 몇 개 변변치 못했던 종로의 시장은 어두웠다. 총독부가 안하면 우리라도 하자며 종로 상인들이 팔뚝을 걷어 부치고 가로등 200개를 목표로 하여 돈을 모아 봤지만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이렇듯 전기의 혜택을 받는 데에도 식민지 조선인들은 가슴의 상처로 남는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심야에도 흥청거리는 ‘혼마치’를 바라보며 종로 상인들은 가래침 깨나 뱉어 댔을 것이다. 


<출처 : tvN 빠스껫 볼>


그런데 이토록 암울하던 시기, 전기조차 식민지 백성을 차별하던 시절 조선인의 자본으로 조선인의 주도로 세워진 전기회사가 있었다. 그것은 개성전기였다. 이름에서 보듯 회사의 근거지는 개성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개성상인’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잠깐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조선 왕조 개창 이후 송도, 즉 개성인은 심각한 차별을 받는다. 조선 왕조가 열린 후 개성 출신에게 과거 응시가 허용된 것은 왕조 개창으로부터 무려 80년 뒤였고 그나마 소과 합격자가 배출된 것은 성종 17년(1486), 문과 대과 합격자가 나온 것은 연산군을 건너뛰어 중종 대(1515년)에 이르러서였다. 즉 왕조가 열린 후 123년만의 일이었다. 그 후로도 조선이 멸망하기까지 개성 출신으로 최고위에 이른 것은 참판직(오늘날의 차관)이었다. 즉 조선 왕조 500년간 그 흔한 ‘정승판서’ 가운데 개성 출신은 한 명도 없었던 셈이다. (오성, 신의와 소통의 개성상인 중) 


그런 분위기에서 입신 출세 길을 차단당한 개성 사람들의 에너지는 상업을 통한 경제적 부를 향하여 흘렀다. 자연삼을 인삼으로 재배하는 법을 실용화시킨 것이 개성상인이었고 조선 후기 내내 최고 인기 상품이었던 인삼의 상권을 틀어쥐었던 집단도 개성상인이었다. 구한말에도 그 위세는 빛을 잃지 않아 당시 조선식산은행 개성 지점 등에서 운용되던 자금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돈이 개성상인 내부의 금융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 이 개성상인들이 신문물의 총아라 할 전기 사업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다. 

<손봉상(좌)과 공성학(우) / 출처 : 위키백과>


개성의 유지들 사이에서 전기사업이 논의된 것은 1914년 경부터의 일이었는데 논의에는 유수한 개성 상인들이 총출동하고 있다. 영신사 사장 손봉상, 개성사 사장 박태현을 비롯 공성학, 최증지, 고수후 등 내로라 하는 이들이 모여 개성전기의 창업 발기인 대회를 가진 것이 1915년 11월 30일의 일이었고 장소는 역시 개성의 유력한 자본가 김정호의 집이었다. 그리고 김정호는 ‘개성전기’를 실질적으로 이끈 사람이었다. 

메이지 대학 유학생이기도 했던 김정호는 발기 취지문에서 “눈 앞의 작은 이익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전기산업같은 원대한 거업(巨業)을 세우는 것이 개성 지방과 민족 발전에 공헌하는 길”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개성 상인의 저력일 뿐만 아니라 전기를 장악하고 식민지 백성들에게 위세를 부리던 일본인들에 대한 도전장이기도 했다. 


<개성남대문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개성전기는 착실하게 발전했다. “산요전기로부터 양도된 80마력의 원동기와 70kW 흡입가스발전기를 1918년 3월 28 설치하고 그해 4월 1일부터 전력공급을 시작하였다. 1920년 6월 150kW 발전기를 증설하였고 1926년에는 250kW급 기력발전기를 독일로부터 도입하여 신막(新幕)발전소를 신설하였다. 1931년에는 다시 1,000kW급 발전기를 증설하여 총 발전설비는 1,470kW로 늘려 나갔다. 공급구역을 개성외에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등 산간벽지까지 배전선을 연장하여 1936년말 대흥전기 898.1km 보다 많은 968.4km 의 배전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기신문 1307호 중)


민족자본으로 이뤄진 전기회사 중 가장 잘 나갔으며 전기요금 체계 또한 가장 저렴한 경성전기와 맞먹는 경쟁력을 지녔던 개성전기는 그 발전상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탐욕의 대상이 된다. 조선총독부는 전기사업에 참여한 민족자본을 몰아내고 일본 자본 독점 체제를 갖추기 위해 1932년 ‘조선전기사업령’을 공포했고 개성전기는 ‘서선합동전기회사’의 일부에 합병되고 말았던 것이다. 개성전기의 김정호는 전기사업에서 물러난 뒤 개성상인의 본연의 사업이라 할 인삼업에도 뛰어드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다. 비록 사업가로서 일제 당국과 결합했고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이라 할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는 등 친일파의 오명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우나 김정호를 비롯한 개성전기의 주요인물들이 일제 강점기를 조금이나마 밝혔던 조선의 빛이었음도 부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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