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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다니엘 크레이그를 새로운 제임스본드 역으로 발탁한 제작사는 007 팬들의 거센 항의를 견뎌야했다. 말끔한 수트를 차려입어야 하는 첩보원을 연기하기에 다니엘 크레이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건강한 운동선수를 연상시킨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그가 연기한 <007 카지노로얄>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리즈를 리부트 시켜, 그간 007에게서 찾을 수 없던 리얼리티를 부여함으로써 가사 상태에 빠졌던 제임스본드에게 차기작에도 등장할 수 있는 산소호흡기 역할을 했다.


<007 스카이폴 / 출처 : 네이버영화>


7년 전. <본 얼티메이텀>으로 본 시리즈의 트릴로지가 완결됐을 때 들었던 생각은 ‘제임스본드가 미녀와 마티니를 마실 때, 첩보원 본연의 일들은 제이슨 본과 같은 인물이 모두 처리하겠구나’ 였다. ‘제이슨 본’이 국가가 원하는 첩보원의 표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맷 데이먼이 연기한 제이슨 본은 선악에 관심이 없고 단지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고 싶어 치열하게 탐구하는 남자였다.


<본 얼티메이텀 / 출처 : 네이버영화>


얼마 전. <킹스맨:시크릿에이전트>(이하 킹스맨)의 엔딩 크레딧을 보며, 역설적이게도 ‘불쾌한 유쾌함’이라고 부를법한 감정을 느꼈다. 우리는 이미 ‘진짜 적은 우리 안에 있다’고 외친 제이슨 본을 만났고, 냉전체제를 벗어나 각성과 회의에 차있는 제임스 본드도 만나봤다. 이런 우리가 어째서 영국적인 특징들을 끌어들인 진부한 설정의 스파이 액션물을 이토록 유쾌하게 즐기고 있을까.


스파이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특정 국가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스스로 ‘정의’를 자임하던 007 시리즈에 관객들이 눈을 돌릴 무렵, 제이슨 본이 나타났다. <본 얼티메이텀>까지의 맷 데이먼이 신선했던 이유는 국가 간의 선-악 구도를 배제하고, 액션의 스타일부터 인물의 내면까지 철저한 리얼리즘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후 <007스카이폴>에 이르러 제임스본드도 철이 들었는지 요상한 신무기를 과감히 버리고 과장된 액션을 최소화하면서 리얼리즘을 추구했다. 연이어 이 리얼리즘을 더욱 극단으로 몰아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나 <모스트 원티드맨> 등도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판타지적 첩보원’의 시대는 막을 내리는 듯 했다.


<팅커테일러솔저스파이(좌) 모스트원티드맨(우) / 출처 : 네이버영화>


그러나 <킹스맨>의 해리하트(콜린퍼스 분)는 그간의 고뇌하는 스파이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긋는다. 고급스러운 차림새는 물론,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각종 첨단 장비까지. 현실성을 모조리 벗어낸 해리하트 그간 우리가 남성 패션 잡지에서나 봐왔던 알파메일(alpha male)적 요소의 결집체다. 그렇다면 이다지도 비현실적으로 포장된 첩보원이 우리관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웅과 악당의 대립

우선 제임스본드와 해리하트의 몇 가지 차이점을 살펴봐야겠다. 제임스본드는 깊은 고민 없이 악당을 규정하고 그 대상을 요란하게 응징한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스스로 정의를 실현했노라 미소를 짓는다. 이 기름진 첩보원은 일종의 메시아적인 판타지로 가득한 구시대의 영웅을 떠올리게한다.


<숀코네리(좌) 와 피어스브로스넌(우)의 007 / 출처 : 네이버영화>


반면 리하는 불타는 정의감에서 한 발짝 물러나 첩보원을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는 인상이다. 오랫동안 같은 일을 반복해온 이들이 으레 그렇듯, 해리하트는 첩보원의 업무에 대해 열정과 성의를 찾기보다 결코 멸종되지 않는 크고 작은 악당과 묵묵히 맞서고 있는 인물로 보인다.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는 서방 첩보원에게 염증을 느끼던 관객 입장에서 이 얼마나 올바른 주인공의 자세인가.


<킹스맨의 해리하트 / 출처 : 네이버영화>


이제 악당을 살펴보자 007에 등장하는 수많은 악당을 관통하는 하나의 맥이 있다면,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세계정복을 꿈꾸는 이들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킹스맨>의 리치몬드 발렌타인도 마찬가지다. 시민들에게 신경을 조작하는 USIM칩을 나눠주는 IT부호로 설정된 이 악당은 ‘지구를 지키려면 인류의 개체 수를 줄여야 한다’는 꽤나 거창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신념은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관이기도 하다. 


<킹스맨의 리치몬드 발렌타인 / 출처 : 네이버영화>


달리 말하면 이전의 007 시리즈는 극악무도한 악당을 만들기 위해 냉전체제까지 빌려오는 무리수를 선택했지만, <킹스맨>은 비록 잘못된 생각일지라도, 단지 스스로의 가치관에 의해 과대망상에 빠져버린 한 인간을 악당으로 설정했다. 세계를 정복하고 단 하나의 디스토피아에서 홀로 왕이 되겠노라고 소리치던 악당에 비하면 리치몬드 발렌타인은 얼마나 인간적인 악당인가.(심지어 비위가 약해 피 한 방울도 못 보는 그다.)


감독인 메튜 본은 극 초반에 해리하트와 에그시(태론 애거튼)의 계급적 차이를 강조하거나 에그시가 단련을 거듭하는 성장의 모티프를 끌어들이면서 <킹스맨>이 그저 악을 때려잡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해명한다. 물론 계급이나 성장담의 설정이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극히 미미한 점은 “그렇다고 해서 거대한 악의 이야기를 일장연설로 풀어놓자는 것도 아니다” 라는 메튜 본의 태도 역시 짐작케한다.


<킹스맨의 해리하트와 에그시 / 출처 : 네이버영화>


<킹스맨>의 해리하트는 어쩌면 멋부리지 않으면서도 멋진 제이슨 본(맷 데이먼)의 성격과, 멋진 척을 하지만 멋있지 않은 과거 제임스 본드의 유일한 장점인 패션을 결합해 만든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역에 콜린퍼스라는 너무도 영국적인 남자를 배치한 것은 대성공이었다.


쇠락하는 첩보물의 시대에, <킹스맨>은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성과를 이룬 스파이영화의 예로 종종 언급될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의 스파이물을 기획 중인 감독은, 제임스 본드제이슨 본해리하트까지 이어지는 남성 판타지를 어떻게 변주할지 고민이 깊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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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한복기 2015.03.12 17:36
    너무 압도적으로 콜린퍼스가 멋있죻ㅎㅎ 오랜만에 몰입해서 봤네요 저도
  • 껍질만먹는다 2015.03.12 17:38
    저는 부하인 가젤이참 매력적이더라고요ㅋㅋㅋ예쁘고 섬뜩한 느낌적느낌
  • BlogIcon 똔뚜! 2015.03.12 21:17 신고
    영화가 재밌어보이네요
    잘보고갑니다
  • BlogIcon 부랑자oh 2015.03.12 23:39
    독특한생각이네요 다본것같은데 생각이 새록새록~^^*
  • 게다리개다리 2015.03.13 10:51
    멋진글이네요저도 모두 재밌게본 영화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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