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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지난 IMF 시절이 기억 나시는지요?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금모으기 운동이 일어났죠? 전국에서 350만명이 참여하여 약 227톤의 금이 모였다고 하니, 정말 대단합니다. 나라의 부채를 갚기 위해 소유한 금을 자발적으로 내어놓은 우리국민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자발적 운동은 우리국민 특유의 숭고한 애국심이 있기에 가능했는데요. 다른 사례 역시 100년도 더 전인 1907년 대구에서 있었습니다. 나라의 빚을 갚기위한 운동! 바로 국채보상운동입니다.

 

제가 오늘 방문한 곳은 대한민국기부문화의 일번지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랍니다. 이 곳을 둘러보면서 IMF 금모으기 운동의 뿌리가 되었던 국채보상운동에 대해서 소개해 드려볼까 합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안내책자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념관 전시실 내부를 소개하는 책자이구요. 다른 하나는 전시실을 돌아보며 알게 된 내용들을 돌아볼 수 있는 퀴즈 활동지랍니다.



때는 1905년. 열강의 이권 침탈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였습니다. 이 때부터 일본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권리를 하나씩 빼앗아가게 됩니다. 외교권을 강탈한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차관을 쓰게하죠. 또 일본은 재정고문 '메가타' 를 대한제국으로 보내 화폐정리 사업을 실시합니다. 백동화를 제일은행권으로 바꾸는 것이지요. 이로 인해 상업자본과 은행자본이 몰락하게 됩니다.

 

결국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우리의 선조들은 이 국채를 갚기위한 운동을 준비합니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서상돈님, 김광제님, 윤필오님에 의해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죠.


1907년 2월 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됩니다. 기념관에서는 시기마다 얼마나 확산되었는지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있었는데요. 하나 하나씩 눌러보니 얼마나 전국적인 운동이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저 불빛들이 보이시나요? 1907년 6월 이후의 전국전인 국채보상운동의 모습인데요! 이 때가 가장 국채보상운동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곳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진행되고 있네요.

 

양기탁과 배델.

양기탁과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는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여기서 베델이라는 영국인을 주목해야합니다. 우리의 항일항쟁을 위해 외부인으로서 물심양면 도움을 줬던 기자죠. 외국인이라는 신분의 이점을 이용해 일제의 악한 모습들을 전세계에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1897년 아관파천 후 조선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국채보상운동의 소실을 듣자마자 금연을 시작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영친왕의 길례도 연기 시켰습니다. 그만큼 국채보상운동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대동광문회에서 서상돈은 "국채 1300만원을 갚지 못한다면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돈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 국민들이 담배를 3개월정도 끊고, 그 대금을 매월 1명당 2전씩 모은다면 우리의 힘으로 국채를 갚을 수 있다"고 하며 국민들을 독려했죠. 그리고는 손수 당시로서는 큰 돈인 100원을 내놓고 그 자리에서 국민의 동참으로 2,000원을 모았답니다.

 

이를 시작으로 대구에서 본격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대구내에 시장상인, 여성들, 기생들을 포함아여 도적 떼들까지 참여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층민들의 참여가 활발 했다는 점입니다. 기생들의 장신구 판매금이라던지, 걸인들의 구걸한 돈들이 국채보상운동 기부에 쓰여졌답니다.


전국민적인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예상보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확산되자 일본도 위기의식을 갖고 국채보상운동을 반일 운동으로 취급하여 일진회를 조종하여 방해를 하게 합니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 하고 있는 자들이 사실은 국채를 갚으려고 운동을 시작한게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리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운동의 주도자인 양기탁을 구속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양기탁은 무죄를 선고받게 되지만,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구심이 증가해 국민들의 참여가 차츰 줄어들게 됐죠.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국채보상운동은 민족의식의 함양과 독립사상을 고취할 수있는 운동이었습니다. 신분과 성별, 연령, 국적을 초월하여 전개된 범국민적 전국 운동이었고, 1919년 3.1만세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민족의 저력이 되었고, 더 나아가 1997년 IMF 위기 속 금모으기 운동의 뿌리 깊은 원동력이기도 했죠.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는 국채보상운동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영화관이 있습니다. 이 영화관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국채보상운동도 보실 수 있고 학생들이나 어른들을 위한 사진자료를 첨부한 영화도 있답니다.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한눈에 보실 수도 있답니다. 근대사의 흐름을 보시고 국채보상운동 기념관을 둘러보시면 더 알기 쉽고 재미있게 기념관을 둘러보실 수 있어요. 저는 한국사 시험을 공부하면서 공부했던 내용들이라 더 재미있고 유익하게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


기념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둘러보고 공부한 내용들을 확인 할 수 있는 퀴즈 터치패드가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내용들을 한번 확인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틀리시면 아주 부끄러우실거에요~



국채보상운동 기념관은 국채보상운동공원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밤이 찾아오면 국채보상운동공원 길에는 아름다운 조명이 켜진답니다. 지금은 조금 한적하지만 바로 얼마 전인 연말 시즌에는 사람이 어마어마 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기념관에 대해서는 공식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더 많은 정보를 더 얻으 실수 있으시구요! 국채보상운동 기념관 주소는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 2가 42번지 입니다. (TEL. 053-745-6753)

 

이렇게 국채보상운동 기념관을 돌아보았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 학생운동 인 국채보상운동은 우리나라의 위대한 역사적 유산이자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현명한 선조들의 지혜죠? 여러분도 대구에 오시면 한번쯤 들러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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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브리맨 2015.03.02 19:20
    선조들은 위대하네요 역시!
  • 시오랑 에밀 2015.03.02 19:21
    저때나 IMF때나 국가위기에 뭉치는 힘은 우리민족성인가봅니다^^
  • 김성균 2015.03.02 19:23
    당시 1,300만원이면 엄청난 돈이지요...~앞으로도 대한민국에 저런 일은 없어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