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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뤽 다르덴 형제 감독의 2015년작 <내일을 위한 시간>에는 양자택일의 딜레마가 등장한다. 태양전지 패널을 제조하는 기업의 근로자인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는 병가를 마치고 복직을 기다리던 중, 사(社)측이 동료들에게 자신의 복직과 1,000유로의 보너스 중 하나를 투표로 결정하자고 권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투표가 시작되기 전까지 산드라가 16명의 동료들을 찾아가 설득하는 이틀간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1. 선택지의 폭력성


다르덴 형제는 관객이 산드라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동료들의 인도적인 선택을 바라도록 만들지 않는다. 때문에 ‘회사-근로자-실업자’ 라는 사슬에서 섣부른 선택을 유발할 수 있는 느슨한 근거를 전부 제거시켰다. 다시 말해 등장인물 모두를 각자 개인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빠뜨림으로서, 산드라의 복직과 1,000유로의 보너스 중 어느 한 가지가 다른 쪽에 비해 더 윤리적이라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화를 출발시킨다.


산드라는 현실이 힘에 부친다. 우울증에 걸려 있으며, 남편·두 명의 자녀와 이제 막 임대주택을 벗어났고, 그 대가로 노동을 통해 막대한 대출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 / 출처 : 네이버 영화>


반면 동료들의 처지도 녹록치 않다. 누군가에게 1,000유로란 1년치의 각종 세금이며, 누군가에게는 당장 마련할 길이 없던 자녀의 학비이고, 어떤 이에게는 오랜 불편을 줬던 주택의 수리비용이다.


심지어 양자택일을 강요한 회사마저 사정이 있다. 아시아 국가들의 저렴한 인건비로 실적이 예전만 못해 수익이 줄었으며, 근로자들에게 일회적인 보너스를 지급하더라도 산드라에게 지출되는 고정 임금만은 피해야 하는 상황이다.  


누구도 유도하지 않았지만, 어떤 선택도 강요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 <내일을 위한 시간>속의 던져진 이 모든 설정은 어느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부여한 ‘강요된 선택’이 아닌 우리 모두가 동의한, 신자유주의 사회의 원칙이 불러온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양날을 향해 있다.


결국 영화는 가장 비폭력적이고 이상적이라 여겨 채택했던 사회의 원칙으로 인해, 돈과 동료 중 하나를 반드시 잃어야 하는 폭력적인 선택지 앞에 놓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이야기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 / 출처 : 네이버 영화>


2. 탈개체와 익명의 유혹


선택에 있어 인간이 온전히 스스로 윤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오만일 수 있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는 산드라의 동료들이 선택을 하는데 크게 두 가지 요소가 개입되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 로랑베그는 자신의 저서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에서 “집단 속에서는 개인의 도덕적 자의식이 약화되고 평소의 개인적 신념과 모순되는 행동을 저지르기가 수월해진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집단 안에서의 탈개체성’이라고 명명한다. 로랑베그의 말을 조금 확대해서 풀이하자면, 인간의 윤리의식은 독자적인 개체일 때와 집단의 일원일 때가 다르고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정호 감독의 2014년작 <방황하는 칼날>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모티프를 볼 수 있다. TV에서 본인과는 전혀 관계 없는 성폭행 뉴스를 전해 듣고, 저런 ‘녀석’들은 엄하게 단죄해야 한다고 말하던 부모는, 그 ‘녀석’이 자신의 아들이 되자 “우리 애는 범죄를 약간 거들었을 뿐이지 않느냐”며 책임을 다른 피의자 집단 속에 숨기기 급급하다.


<'방황하는 칼날' /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러나 다르덴 형제는 이 같은 윤리적 딜레마가 굳이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사건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일상에서 빈번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 증거는 산드라가 자신을 위해 투표해줄 것을 요구할 때마다 동료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먼저 묻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산드라. 너의 복직을 위해 투표하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더 있냐?”는 질문이다. 


동료들은 회사라는 집단 속에서 다른 이의 선택과 자신의 의견을 비교측정하며 잠시 결정을 유보한다. 물론 동료들 중 1,000유로의 보너스를 선택한 사람이 많다면 내가 돈을 선택하는 죄책감은 줄어든다. 반대로 산드라의 복직을 선택한 이가 많다면 보너스를 선택하기는 조금 더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다르덴 형제가 <내일을 위한 시간>에 침투시킨 선택 개입의 요소 중 첫 번째, 윤리의 탈개체성이다.


또 다른 선택의 개입 요소를 흥미로운 실험 예시로 살펴보자. 플로리다 대학의 스콧 프레이저는 초등학생들에게 다른 아이와 힘을 겨루는 놀이를 하게 했다. 서로의 안전을 생각하며 적정선에서 힘을 겨루던 아이들에게 가면 등 변장 용품을 착용하게 하자 상대를 거칠게 밀거나 넘어뜨리는 등의 공격적 행동 비율이 2배 이상 높아졌다. 자신의 얼굴이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윤리적 속박을 끊어내기가 한결 편안해진 것이다. 두 번째 요소는 바로 이 익명성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 / 출처 : 네이버 영화>


자신을 위한 투표를 호소하는 산드라에게 어느 동료는 말한다. “내가 너의 복직에 표를 던지더라도, 그 사실을 회사가 알지 못해야만 한다”. 물론 이 말은 ‘내가 1,000유로에 표를 던지더라도, 산드라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해야만 한다’는 뜻을 함의한다.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는 ‘비밀투표’의 원칙을 산드라에게 굳이 재확인해야만 우리는 선택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3. 매설된 선택의 변수들


그렇다면 반대로 선택을 혼란스럽게 하는 요소와 함께, 다르덴 형제의 치밀함을 들여다봐야겠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의 도덕률은 집단 속에 숨으려는 속성이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더욱 강해진다. 가령 100명 중 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도덕률은 10명 중 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도덕률보다 그 강제성이 현저하게 낮다.


<'내일을 위한 시간' /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러나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투표자가 고작 16명이라는 설정은, 동료들이 자신의 선택을 집단 속에 감추기에 한 뼘만큼 모자라다. ‘나의 도덕성이 타인에게 의심받을 수 있다’는 위협을 주는, 미묘한 숫자 속에서 동료들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이에 대해 장 피에르 다르덴은 인터뷰를 통해 “극중 산드라의 동료들에게는 20명 안팎의 인원이 가장 난처한 숫자라는 생각을 했다. 이 근로자 규모에 맞는 크기의 실제 기업을 촬영현장으로 섭외하는 과정에서도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고 밝혔다. 


또한 사(社)측이 제시한 보너스의 금액 역시 그들의 결정을 어렵게 한다. 1,000유로는 일상에서 유용할 돈임에 틀림없지만, 살을 부비며 함께 일했던 산드라를 저버린다는 죄의식까지  덮을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다르덴 형제는 러닝타임 내내 이렇게 심리적으로 미묘한 세부 요소를 매설함으로써, 섣부를 수 있는 관객의 판단을 저지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 / 출처 : 네이버 영화>


더불어 주인공 산드라는 지독한 우울증 탓에, 열일 제쳐두고 적극적으로 동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 오히려 복직을 원하는 자신의 모습이 거지와 유사하다며 더욱 깊은 상실감 속으로 스스로를 끌고 들어간다. 간신히 복직을 한다 해도 자신보다 1,000유로가 필요했던 동료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있으며, 휴직 이전처럼 동료들과 어울려 일할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다.


4. 결정된 도덕, 그 언저리를 방황하는 다르덴


다르덴 형제는 영화 줄거리의 외적인 영역에서도 완성도를 포기하지 않는 일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그들은 이미 1999년 작 <로제타>에서 직장을 잃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바 있다. 그런데 16년의 터울을 두고 2015년에 그가 다시 꺼내 든 이 모티프에서, 산드라는 꼭 16명의 동료에게 자신의 복직을 부탁해야 한다. 형제는 어쩌면, 산업의 도구로 변질된 인간이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허들도 세월에 비례해 많아진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로제타' / 출처 : 네이버 영화>


산드라가 동료들을 찾아가서 꺼내는 말은 매 시퀀스마다 똑같다. “월요일에 나를 위해 투표해줄 수 있느냐”라는 것. 반면 동료들이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놀랍도록 다양하다.


이를테면 자신이 1,000유로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나를 원망하지 말아달라”는 이도 있으며, 집으로 찾아온 산드라를 볼 면목이 없어 아이에게 “엄마 집에 없다고 말하라”고 시키는 여자도 있다. 반면 함께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복직을 위해 투표하겠노라고 다짐하는 남자도 있으며, 거절당하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산드라의 뒷모습을 보고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말하는 여자도 있다.


이는 누군가의 삶을 뒤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선택권이 나에게 쥐어졌을 때, 우리의 평균적인 행동 양식을 영화 속 인물들의 방식과 연결 짓게 하는 다르덴 형제 특유의 작법이다. 실제 감독은 회사 동료들을 성별과 연령대, 인종을 막론하며 마치 눈치를 채라는 듯이 다양한 군상들을 배치시켰다.


<'내일을 위한 시간' / 출처 : 네이버 영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내일을 위한 시간>은 관객에게 기묘한 경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줄곧 자신의 복직을 위해 동료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여성의 위태로운 이야기로 보이던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1,000유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동료들의 숨기고 싶은 사정을 ‘청취’하러 다니는 여성의 이야기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에 형제는 하나의 질문을 추가로 던진다. 우울증을 겪는 근로자는 기업 입장에서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존재로 봐야 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생산성의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동료들이 연대라는 이름하에 그녀를 끌어안아야만 하는가? 이렇게 영화 곳곳에 포복한 질문들은 <내일을 위한 시간>이 감독이 결정한 도덕률을 토대로 관객을 설득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상적인 선택에 가닿지 못한 그 언저리에서, 감독은 산드라와 마찬가지로 일일이 관객을 찾아다니며 초인종을 누르고 “어떤 것이 도덕적인 선택입니까?” 라고 묻는다. 스포일러를 피해 말하자면 다르덴 감독은 산드라를 관습적이지 않은 결말 한가운데에 놓되, 그동안 줄곧 동료들의 고유 권한이었던 선택권을 빼앗아 그녀의 손에 쥐어 줌으로써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장 피에르·뤽 다르덴 형제' / 출처 : 네이버 영화>


시작과 함께 약한 주인공의 불쌍한 얼굴을 들이밀고, 그를 사회적 소수자의 세계로 빠뜨려 얄팍한 언더도그마를 강요하는 영화들은 차고 넘친다. 지금 이 시기에 <내일을 위한 시간> 속 다르덴 형제의 도덕에 관한 질문이 유난히 빛나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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