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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초반 한국의 전기 부족은 거의 만성화된 상태였다. 전기 도둑이 성행했고 송전 제한은 일상의 다반사였다. 1962년 6월 25일 출범 1년의 한국전력은 제한 송전을 발표한다. 이유는 가뭄 때문이었다. 가뭄으로 인해 댐의 수위가 낮아지고 수력발전이 미진하게 된 것이 그 이유였다. 


한국전력은 가정에는 주 12시간, 산업 부문에는 야간 5시간 동안 송전을 끊었다. 지금에 비하면 형편없이 빈약한 네온사인들이었겠지만 그마저도 끄라는 압박이 강했고 가로등도 상당수가 꺼져 도시의 밤은 어두웠다. 


장관이 등장하여 선풍기와 냉장고를 사용하지 말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선풍기와 냉장고가 널리 보급됐을 때도 아니었으나 그마저도 켜지 말라고 할만큼 전기 사정이 절박했던 셈이다. 가뭄이 한 고비를 넘긴 그 해 가을 또 다시 제한 송전이 실시됐다. 이번엔 '삼척 화력 발전소의 터빈 수리' 때문이었다. 날이 가물면 수력발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또 어찌 어찌 지낼만하면 발전소의 터빈이 고장이 나서 온 나라가 허덕여야 하는 상황.


<삼척화력발전소 / 출처 : 사진 대한민국>


어떻게든 전기에 대한 갈증을 풀어야 했던 정부는 1962년부터 66년까지 제 1차 전원개발 5개년계획이 수립, 실행에 옮긴다. 이 기간 중에 광주내연발전소와 춘천 수력 발전소가 신설됐고 왕십리내연발전소, 제주내연발전소, 삼척화력발전소가 그 시설을 확장했으며 영월화력 발전소의 복구가 완료됐고 부산 화력발전소가 건설됐다. 이런 다방면의 노력을 바탕으로 한국전력은 1964년 4월 1일 역사적인 무제한 송전 선언을 하게 된다. 


당시 한국전력에 따르면 3월말 현재 우리나라 발전설비는 수력발전 14만 3천2백 킬로와트를 비롯해서 53만 1천 4백 킬로와트에 달했고 최대 가능 출력은 44만 7천 킬로와트인데 반해 최대 수요량은 43만 1천 킬로와트로 추정됐다. (1964년 3월 31일 동아일보) 특히 부산화력발전소에 설치된 6만 6천kW 용량 발전기 가동으로 최대 전력 49만kW, 전력예비율 5%를 달성한 것이 큰 계기가 됐다.


<부산화력발전소준공식 / 출처 : 사진 대한민국>


1948년 북한이 전기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뒤 한국 국민들에게 일상처럼 자리잡고 있던 격일제 송전이니 시간제 송전이니 하는 송전 제한이 철폐된 것은 크나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물론 전기 사용량이 더불어 급증하면서 그 3년 뒤 예비율이 1퍼센트 이하로 떨어지자 슬그머니 제한 송전이 부활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풍부한 전력 마음 놓고 쓰자' (당시 한국전력이 내건 슬로건)는 무제한 송전 시대가 열리긴 했으나 아직도 한반도는 '풍요로운' 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농촌의 경우는 더했다. 전력은 훨씬 풍요롭게 생산됐지만 그 전기를 활용할 기간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무제한 송전' 선언 1년 후 1965년 2월 22일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근 전화율(電化律)은 24.8퍼센트로 추정되고 있다. 즉 4백13만 1천호의 남한 주택 중 1백2만 7천호에 전깃불이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도시 주변에 그치고 농촌만의 전화율은 단 6퍼센트에 불과하다."


농촌에도 전기! 농어촌 전화 사업이 힘을 받았다. '군청 소재지 주변'에서, '송변전선의 변화 없이', '총 시설 공사비의 10퍼센트를 수용자가 부담할 수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는 등 제한도 많았다. 그러나 원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시작이 반이었다. 점차 전기는 도시의 빌딩숲을 넘어 푸른 들판 펼쳐진 농촌의 밤을 밝히기 시작했다. 해만 지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기 바빴던 농민들의 '저녁이 있는 삶'이 시작됐고 가물이 들면 수력발전소 수위 저하 때문에 인색해진 전기 때문에 양수기 하나 돌리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풍경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삼척화력발전소의 근로자 / 출처 : 사진 대한민국>


제한없는 전기의 활용은 일종의 문화적 변혁에 가까운 일이었다.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이후 인류의 수면 시간이 2시간 짧아졌다는 보도를 얼마 전에 접했거니와, 호롱불에 의지하던 밤이 대낮처럼 밝아진 순간의 기쁨은 어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1966년 5월 23일자에 실린 경북 봉화의 한 여성의 글은 그 서두부터 주체할 수 없는 환희를 내뿜는다. 


"오늘은 분명 이 고장에서 역사가 창조된 날이다. 바로 오늘 저녁 밥을 먹으려고 온 가족이 희미한 호롱불 아래 둘러앉아 있는데 갑자기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방안을 가득 채우지 않는가? 아! 하고 나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바야흐로 '기쁘다 전기 오셨네 온가족 맞으라' 찬송을 부를 기세다. 그 이유를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늘 전등을 사용해 온 고장에서는 모를 것이다. 오랜 세월을 희미한 등잔불만 밤의 위안으로 삼아온 이곳 사람들의 기쁨을." 그리고 그녀의 기고는 전기가 그토록 아쉬워졌던 이유가 사실은 분단과 전쟁에 있었음을 새삼 상기시킨다. "6.25 이전에는 이 고장에도 전등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 때 붉은 괴뢰들이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무너뜨린 후 이제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을 이 마을은 호롱불을 의지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오랜 비문명의 탈을 벗고 농촌 근대화의 혜택을 입게 되었다."


<60년대 중산층 가정 / 출처 : 사진 대한민국>


분단과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했다. 오히려 일제 시대에 전기의 혜택을 누리고 살던 농촌의 한 마을은 전쟁 이후 10여년을 암흑 속에 살아야 했던 것이다. 어디 전기 뿐이었으랴. 1960년 이후 독립한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들보다도 한국의 GNP는 낮은 수준이었다. 1960년 1인당 국민소득을 따지면 북한(134달러)은 남한의 1.5배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 암흑같은 바닥에서 한국 국민들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한 발 한 발 발돋움해 나갔다. 


1960년대 한국과 파키스탄의 GNP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초등학교 취학률에서 파키스탄과 한국은 30퍼센트와 94퍼센트라는 놀라운 차이를 보였다. 밥은 굶어도 아이들은 교육시키겠다는 열망이 온 나라를 감쌌고 그 위에서 한국 경제는 용틀임을 위한 디딤돌을 모색하고 있었다.


<60년대 시험 광경 / 출처 : 사진 대한민국>


그 한 축이 전기였다. 전기의 빛은 전쟁과 가난에 찌든 한반도 남단의 허다한 쥐구멍들에 '볕'을 내리기 시작했다. 동해바다 울릉도에서 태백산맥 기슭까지 수많은 발전소와 송전탑들이 세워졌고 우리 마을, 우리 집에 전기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그로부터 20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이뤄졌다. 


1979년 전국 전기 보급률은 96.7%라는 경이적인 수치로 나타나게 된다. 그 감격을 토로하는 기사 하나로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전기 들어온 날'의 기쁨을 한 번 더 목도하기로 한다. 1977년 9월 1일 경향신문에 충북 괴산의 이삼영이 보낸 편지다. 


"정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온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같았으리라. 밤새 전등을 켜놓고 신기한 듯 온 식구가 전등을 보고 또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이삼영 씨에게는 기쁨 속에서 살아나던 기억이 있었다. 바로 전기가 없던 시절 어둠 속에서 호롱불을 켜 놓고 공부하다가 그 기름 냄새를 당하지 못해 촛불을 켰고 꾸벅꾸벅 졸다가 촛불에 머리를 태워먹었던 날들이 새록새록 다가왔다는 것이다. 전기는 단순히 어둠을 물리치는 물리적 파장이 아니라 한 나라의 어둠의 역사를 전방위로 밝히고, 그 나라의 새롭고도 기적적인 도약을 증명하는 시금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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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규환 2017.06.10 13:44
    소중한 정보 감사 합니다 하도 현정부 밎
    원전 반대론자 들에 우리나라 에 전력현실
    을 바로 알려주고 싶으나 제가 바로 알고
    원전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 해주려 합니다
    우리나라 국력은 전력이 80% 이상이지요
    수고 하시는 전 현직 한전직원분께 감사드립니다
  • repsha1234 2018.11.24 11:31
    전기는 대한민국 발전의 핵심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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