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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났으나 분단은 계속됐다. 남쪽은 북쪽의 발전 시설을 영구히 사용할 수 없었고 5.14 단전 (북한이 남한에 보내는 전기를 끊었던) 이전처럼 값을 치르고라도 끌어올 가능성마저 상실했다. 어떻게든 전기는 자력갱생을 해야 할 초미의 과제였다. 


전기는 국민들의 일상 생활과 경제활동의 기반이 되는 기본적인 인프라였고,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서라도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공공재에 가까운 특징을 지니기 때문이다. 당장 전쟁 때 정부는 일부 부유층의 행태 때문에 골머리를 앓은 바 있었다.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임시 수도 부산은 만성적인 전력난에 시달렸는데 거의 모든 인구가 호롱불에 기대 생활하던 무렵, 일부 특권층은 이른바 '특선'이라는 전기선을 집안에 끌어들여 밤새도록 환하게 켜 놓고 살았던 것이다. 100W짜리 전등을 몇 개씩이나 켜기도 했었다니 휘황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정부가 단속을 해도 아랑곳이 없었다. 이 특권층의 추락한 도덕성은 전쟁 이후로도 이어졌다. 1950년대에는 '도전'(盜電)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글자 그대로 전기 도둑이었다.


1956년 충남도가 단속을 벌인 결과 2,800건의 전기 도둑 사례가 적발됐는데 그 태반은 고위층, 부유층들이었다. (조선일보 1956.2.2.) 그들은 버젓이 전봇대를 지나는 전선에 선을 대 자신의 집으로 전기를 끌어들였다. 1959년 우리나라 발전량은 평균 19만5000㎾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이 중의 12퍼센트가 도둑을 맞고 있었다. 그나마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름 힘있고 잘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경향신문 1959.3.5.) 가히 무전무전(無錢無電), 유전유전(有錢有電)의 시대였다고나 할까.



전쟁 당시 무진 노력을 기울인 끝에 화천 수력 발전소를 탈환하고 복구공사를 시작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노구를 이끌고 화천을 방문했었다. 그만큼 절박하고 소중했던 발전소였으리라. 그는 이런 말을 남긴다. "식량은 사올 수도, 빌려올 수도 있지만 전기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귀중한 자원입니다." 그의 말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전기를 원활하게 공급하지 못하는 한 산업의 발전은 요원했고 전기 공급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국민은 모두 평등하다는 헌법의 가치 역시 구현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전력 기반은 건설돼야 했다. 특히 1955년 이후 미국이 지원한 발전선(發電船)도 철수하면서 자력으로 전력을 확보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일단 한국의 전력 개발의 견인차는 화력발전소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원가가 저렴한 수력을 위주로 하고 나머지 부족분을 화력발전소로 보충하는 시스템이었지만 건설 비용이 비싼 수력보다 화력발전소에 일단 매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남 마산, 강원도 삼척, 서울 당인리 3호기 등 각지에 화력 발전소가 세워졌고 1956년 경 이들이 10만 kW 출력의 전기를 생산하면서 일단 급한 숨을 돌리게 됐다.  발전 형태도 수력 32퍼센트, 화력 68퍼센트의 양상으로 변모했다.


<연백평야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이는 기본적인 산업 운영에 필수적인 전기량이었을 뿐 아직도 국민 대중에게 전기란 멀기만 한 존재였다. 1958년 8월 9일 경향신문 기사를 보자. "발전시설은 장기투자가 필요할 뿐 아니라 전력 손실 방지 계획은 우보(牛步)를 걷고 있어 갈수기나 한발기에 임하게 되면 전력사정은 악화되어 제한송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며 때로 선거 기간 중에는 도시 등에만 편중하는 배전이 실시돼 배전업무까지도 정치에 좌우된다는 일부의 평마저 떠돌았던 것이다."


1950년대 당시 한국은 농업국가였다. 갈수기에 물이라도 대려면 전기가 필요했고 수도 시설을 하는 데에도 전기가 들어갔다. 당장 전쟁 전 5.14 단전 당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던 것은 황해도 연백평야에서 농사짓던 주민들이었던 점을 상기해 보면 전기는 산업 이전에 먹고 사는 문제와도 직결돼 있었다. 그러자면 어떻게든 발전소를 지어야 했다.


1957년 완공된 충북 괴산의 수력 발전소도 그 중의 하나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정부는 대형댐 건설이 불가능한 경제 형편상 작은 계곡들을 막아 댐을 만드는 방식의 발전소 건설 계획을 수립했고 전국 각지의 계곡들을 조사했는데 그 가운데 최적지로 선택된 것이 충북 괴산이었다. 1952년 11월 공사가 시작됐으나 곧 중단됐고 1953년 공사가 재개됐지만 5개월도 못가 공사를 멈추고 말았다.


<괴산댐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자금난도 원료 부족도, 기술도 모두 문제였다. 수 차례에 걸친 공사 중단과 다섯 차례나 되는 예산 변경 끝에야 괴산댐은 1957년 2월 28일 준공됐다. 이는 해방 이후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수력발전소였다. 높이 28미터 길이 171미터의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총 설비 용량 2600 kW였다. 수풍발전소가 일제 때 60만 KW를 생산한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의 발전량이었지만 그마저도 전쟁으로 쑥밭이 된 세계 최빈국에게는 그야말로 '피 같고 살 같은' 전기였다.


1961년 한국 전기의 역사에서 중대한 변화 하나가 일어난다. 조선전업, 남선전기, 경성전업 등 한국의 전기를 책임져 오던 3개 회사를 통합한 한국전력 주식회사가 발족한 것이다. 전기 3사 분리에 따른 생산성 저하와 높은 생산원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발전 및 배전사업의 일원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 건 이미 10여년 전부터였다. 자유당 정부는 이 사업에 착수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4.19 이후 민주당 정부도 우물쭈물하는 가운데 5.16 군사정변을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전력 주식회사가 창립된 것은 1961년 6월의 일이었다.


<한국전력주식회사  설립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윤보선 대통령은 물론 주한 미국 대사 버거 등 내외빈이 총출동하여 한국 전력 주식회사의 창립을 축하했는데 대한뉴스 제 324호를 보면 주목할만한 인물 하나가 거명된다.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은 전력 3사를 통합한 혁명 정부의 과감한 경제 시책을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딘 러스크 국무장관. 그는 어쩌면 5.14 단전 이후 그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오랫 동안 한국을 괴롭힌 만성적인 전력난을 가져온 분단의 선을 그었던 실무 책임자였다. 2차대전 말, 소련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소련군의 급격한 남하가 우려되자 미국과 소련의 잠정적 점령지를 구분할 필요가 생겼고, 미 국무성 소속이었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대령은 "38선을 3성조정위원회(국무·육군·해군의 3성 조정위원회, 스윙크SWNCC)에 제안했는데, 위원회는 그 안을 채택했고, 소련도 즉각 그 안을 수락했던" 것이다.


그 분단으로 말미암아 남쪽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분야가 바로 전기였고 38선을 그은 16년 뒤 딘 러스크는 국무장관으로 한국 전력 주식회사의 발족을 축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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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카지갑 2015.01.07 15:35
    그 시절에도 도전이 있었다니 참.......
  • 한경준 2015.01.07 15:37
    1956년에 충남에서만 2,800건의 도전 사례가????
    있는 사람들이 더 한다는건 진짜 이 나라 전통인가요 ㅠㅠ
  • 미설윤 2015.01.07 15:38
    이렇게 피같은 전기를 막쓰고 있었따니!
  • 채규환 2017.06.10 14:10
    내나이 70세 고향이 서울이라 그래도 어려서
    부터 반쪽에 전기나마 혜택을 받고 살았지요
    반쪽이란 방2개에 벽체 상단에 구멍을 뚤어
    전구다마를 가운대 설치 하고 전기불이 양방에
    비치게 하여 쓰기도 하였지요 부채가 유일한냉방기
    물통에 물받아 그속에 과일 찬밥넣어 보관하는게
    냉장고 지금에 현실은 천국이지요 이좋은세상 공산
    국가 북한에 무력으로 넘겨줄수가 없습니다
    애국하는 마음으로 사욕을 버리고 모든정치인들이 바른길 가주시길 한 소인이 간절히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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