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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출세보다, 팀원의 의기투합을 더 중요시 여기며, 심지어 계약직 사원 장그래를 정규직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오차장.


후배 앞에서는 무뚝뚝하게 대하면서도, "우리 얘만 혼났잖아"라고 술 주정을 해대는 나름 '귀여운' 휴머니즘으로 꽉 들어찬 상사. 2차 술 접대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진, 참 배울 것도 존경할 것도 많은 상사.


이성민이 분한 이 '정의로운'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 SNS에서는 특이한 현상 하나가 등장했다. '라인에 설 줄 모르고, 후배들을 절대 착취하지 않으며, 오로지 성실하게 노동에만 임하는' 오차장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식의 동정 어린 호소가 많았다는 것이다. 동시에 세상의 많은 노동자들은 <미생>이 훌륭한 드라마라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오차장 같은 상사는 '판타지'라며 차갑게 일갈했다.


<'미생'의 오차장(이성민 분) / 출처 : tvN 홈페이지>


그러니까 자신이 오차장 같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은데, 실제 자기 상사를 오차장 같다고 생각하는 후배는 별로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조금은(혹은 많이) 과장된,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오차장'이라는 판타지를 빌려와, <미생>이 우리에게 말하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생>이 좀 더 관심을 보이는 것은 시스템도 시스템이지만, 관계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즉 선배, 후배, 동료로 짜여진 조직 관계들 말이다. <미생>을 보면서 진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생존'이 아니라, 관계의 '오염'이 아닌가 싶었다.



1997년 IMF 이후, 모든 관계에는 신자유주의가 강림했다. 조직을 휩쓸어버린 신자유주의는 대량 해고, 부서 개편, 비정규직 전환, 계약직 시대, 그리고 '88만원 세대'를 낳았다. 그 사이, 사람들의 모든 내면엔 불안과 공포가 자리 잡았고, 가장 큰 희생자는 이제 막 세상에 내던져진 이십대들이었다.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못한 거다'라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자조적으로 읊조릴 수밖에 없는 장그래. 멘토를 열렬히 희망하지만, 정작 멘토들에게 적절한 충고를 받지 못하는 바로 그들이 가장 큰 피해자다. 


선차장에게 절규하듯 내뱉은 오차장의 "대책없는 희망과 위로가 무슨 소용 있냐.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 더 힘들다"라는 대사처럼 한국 사회는 후배에게 따스한 말조차 건네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었다. 조직 생활의 힘겨움을 함께 나누던 동료는 경쟁 상대가 됐고, 존경하던 선배는 선차장의 에피소드처럼 "내가 밟고 올라갈 무엇"이 됐으며, 안영이처럼 똑똑한 후배는 "싹부터 잘라내야 할 무엇"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국에, 장그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상사 캐릭터 오차장은 어느 샌가 판타지가 됐다.



아마도, 분명 수십 년 전에는, 아니 십년 전만 해도 오차장 같은 상사는 더러 존재했을 것이다. 아니, 꽤 많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점점 희미해지고, 사라지고 있을 뿐. 


그래서 <미생>은 다시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아무리 비현실적이라 나무라도 오차장, 김대리, 선차장 같은 상식적인 도리와 인간에 대한 감수성을 품는 사람이 희망이라고 말이다. <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는 일류대 출신의 장백기가, '자신과 보내온 시간이 다르다'고 믿는 장그래에게 '내일 봅시다'라고 하면서 연대의 손을 내뻗는 장면이다. 


십대부터 끔찍한 경쟁의 시간을 보내온 초스펙 청춘들이,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또 다른 노스펙 청춘들의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는 건 새로운 전환기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아니라, 같은 구조 안에 놓인 '친구'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을 때,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같은 '노동자'라는 사실만 직시한다면, 김대리나 오차장, 선차장 같은 마음을 후배에게 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대리들과 신입 사원들을 한 방에 모이게 한 장면은 마치 <응답하라 1997>의 MT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호칭 필요없이, 그저 '친구'였음을 환기시키는 가장 아름다운 신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아주 크게 보면 조직에서의 차장, 대리, 신입사원, 인턴, 계약직 모두 같은 신세인 '노동자'이니까 말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투게더>라는 책을 펴내면서, 오차장과 김대리 같은 사람들이 판타지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내면에 존재하는 강력한 힘이라고 주장했다. 아주 오랜 시간 인간은 협력하며 살았고, 그 DNA가 아주 강력하게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다고 말이다. 그의 탁월한 혜안이 그려진 이 <투게더>라는 책을 보면서, <미생>의 아쉬움을 달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또 하나 <미생>의 '선한 캐릭터'들이 모두 판타지였다면, 아마도 '깐깐한' 시청자들이 그리 쉽게 마음을 내주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열광적인 반응 또한 날카로운 현실성과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진실 덕분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생>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었던, 우리 안의 '오차장'을 발견해주고 떠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소 낯간지럽지만, 마음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너희들의 뜨거웠던 오늘을 기억해라"라는 대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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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짐자무쉬 2015.01.07 15:33
    나만은 절대로 좋은 상사라는 생각 ㅋㅋㅋ격공 ㅠㅠ
  • 허삼관 2015.01.07 15:34
    다들 착각을 하죠 흑 -_ㅠ
    그런데 착각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게 함정
  • 겨울우화 2015.01.07 15:35
    많은 생각을 하게되네요~정말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의 비법은 뭘까요
  • BlogIcon 기용주 2015.01.08 16:45
    안녕하세요 .한고등학교2학년인데요.ㅂ
    저는지금 드라마가아닌 원작 만화를 읽고있습니다. 읽기전에좋은정보감사합니다.
  • 심심 2015.01.09 09:03
    글 좋네요ㅠㅠ
  • 2015.01.09 10:49
    좋은 글 읽고 갑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