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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이 전쟁 발발 후 24개월이 되도록 수풍 발전소를 공격 대상에서 제외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중국과의 접경지대에 폭격을 가할 경우 자칫 중국 영토를 폭격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며, 전쟁 초반에는 UN군의 승리가 낙관적이었으므로 통일 한국의 시설을 쳐부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었고 휴전 협상 시작 이후로는 협의 중단의 빌미가 될까봐 폭격을 자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공을 들이던 휴전 협상이 지지부진하고,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태 등 미군의 위신이 크게 꺾이면서 미국은 수풍 발전소 폭격을 결행한다. "북한은 물론 만주 지역에까지 전기를 공급하고 있으며 중국 단동의 미그기 비행장과 푸순의 공장들까지도 이 전기로 운용되는 바 명백한 군사적 목표"라는 것이 작전 입안자들의 주장이었다.


1952년 6월 23일 오후 4척의 항공모함 기동부대에서 일제히 500여 대의 해군 전폭기들이 떠올랐다. B29 같은 대형 폭격기는 대공포나 적기의 반격에 취약했으므로 사용되지 않았다. 공격 목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미군 전폭기들은 거의 완벽한 기습에 성공했다. 공산군측 미그기의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은 채 그들은 압록강 수풍댐 상공에 도달해 900톤이 넘는 폭탄을 뿌리기 시작했다. 수풍댐은 콘크리트로 된 중력 댐이었던바 홍수에는 강했지만 폭격에는 매우 취약한 댐이었다. 만약 미군이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루르 지방의 댐들을 공격했던 방식으로 댐 공격에 성공했다면 북한 신의주와 중국 안동 일대는 물바다로 초토화됐을 것이다.


<수풍댐 / 출처 : 위키백과>


댐 파괴는 면했으나 발전 시설은 심대한 타격을 피하지 못했다. 미군의 폭격을 막기 위해 주로 중국 쪽에 설치돼 있던 대공포대가 불을 뿜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화산과 같은 연기” (폭격 편대 지휘자 다우닝 중령)와 함께 발전 시설은 잿더미가 됐다. 이를 시작으로 장진 부전 허천강 등 개마고원 일대에 일제가 건설했던 발전 시설들이 차례로 폭격을 받는다.


미 공군의 사정없는 폭격은 북한을 공황으로 몰아넣었다. 수풍 발전소 시설의 70퍼센트가 마비됐고 발전소 15곳 가운데 13곳이 중대한 손실을 입었다. 일설에 따르면 북한은 2주일 동안 전력 공급이 거의 마비됐으며 만주 지역의 전기 공급량도 1/4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북한 정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당시 중국의 외교부장 조우언라이(周恩來)는 당시 북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수풍발전소가 폭격당한 이후 북한 주민들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북한 지도부까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수풍댐 폭격에 부담을 느낀 북한 동지들이 정전협상에 집착하게 됐다.” 북한의 이른바 국장(國章)에도 어김없이 들어가 있는 수풍발전소는 북한에게는 어마어마한 의미를 지닌 발전소였고 발전소가 생산하는 전기는 포기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생명줄이었던 것이다.


<화천 수력발전소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그것은 남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도 동부전선은 험준한 산악 지역으로 유명하지만 6.25 때는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요 첩첩산중의 연속이었다. 이렇다 할 도로도 교통로도 없는 곳에 수만 대군이 투입됐고 종군기자들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는 고립된 전투 속에 정확한 수조차 알 수 없는 남과 북, 중국과 UN군 청년들이 죽어갔다. 얼추 10만 명은 넘게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그 치열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토록 격렬한 전투의 중심에는 발전소가 있었다. 북한강 유역에 건설된 화천 수력발전소였다. 1944년 5월 제1호기를 준공, 발전을 개시한 뒤 같은 해 10월에 2호기도 준공되면서 강원도 뿐 아니라 서울 경기 일원까지도 전력을 공급했던 시설 용량 10만8천 kW의 요긴한 발전소였다. 원래는 38선 북방에 있어서 북한 땅이었던 이 발전소를 두고 10여 만 명의 목숨이 사라져간 일대 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6.25때 중국군은 물량 공세를 펼치는 미군보다는 화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군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한국군 사상 최악의 참패로 꼽히는 현리 전투를 비롯 한국군은 중국군의 맹공에 맥없이 무너질 때가 많았으나 전쟁 후반으로 가면서 기세를 되찾았는데 특히 국군 6사단은 양평 용문산 전투에서 중국군을 대파하면서 북한강을 따라 북진할 기회를 잡는다. 화천댐이 만들어지면서 조성된 화천호 인근에서 국군 6사단은 다시 한 번 중국군을 궤멸시키고 화천 발전소를 장악하게 된다. 이 대승을 기념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오랑캐를 물리쳤다는 뜻으로 ‘파로호’(破虜湖) 라는 휘호를 내리는데 우리가 아는 화천의 파로호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산군도 이 화천 발전소를 순순히 포기할 뜻은 없었다.


<반공포로 석방 /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1953년 휴전협정의 막바지에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 석방을 결행한다. 공산군측은 이를 도발 행위로 간주하고 격렬히 항의하는 한편 화천 지역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준비한다. 1953년 당시 남한 전기의 30퍼센트를 공급하던 요긴한 발전소가 위치한 화천 일대는 다시 한 번 격전지로 화한다. 1953년 7월 13일 휴전 협정 조인을 2주일 앞둔 시점에서 화천 지구에는 중국군의 대부대가 몰려들었고 국군 7사단을 위시한 아군 병력은 이를 막아내기 위해 필사적인 전투를 치른다. 전투는 영화 <고지전>처럼 7월 27일 휴전 당일까지 이어졌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죽어간 중공군과 한국군들은 억울해 땅을 쳤을지도 모른다. 단 며칠만, 몇 시간만 더 살아 남으면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데..... 휴전을 코 앞에 둔 마지막 전투에서 한국군은 2천명이 넘게 전사했고 중공군은 3만 이상이 죽어갔다. 그들이 죽어갔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화천 수력 발전소였다.


화천 지역에는 그야말로 병풍 같은 산들이 펼쳐져 있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백암산도 그 중의 하나. 전쟁 후 10년이 흘러간 뒤에도 산 곳곳에는 전쟁 때 죽어간 이들의 시신과 유류품이 굴러다니는 일이 흔했다. 그무렵 장교로 근무하던 한명희라는 사람은 순찰 중 돌무덤 하나를 발견한다. 원래 십자가 비목 위에 철모를 걸었던 것 같은데 십자가 비목은 썩어 쓰러져 가고 철모는 땅에 뒹굴고 있었다. 장교는 그 처연한 느낌을 후일 가사로 옮겼고 라디오 방송 PD가 됐을 때 숙직실에서 작곡가 한 명과 의기투합하여 노래를 만든다. 이 노래가 유명한 가곡 <비목>이다. 아마 그 비목의 주인공 역시 그의 나라의 밤을 밝히고 산업을 일으킬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소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어간 이름 없는 젊은이였을 것이다.


<비목>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제작년도 : 1967년    
  작사: 한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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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블레의아이들 2014.12.29 17:38
    예전 국사 시간에 현리 전투에 대해 들었던 생각이나네요....또르르
  • 언브로큰 2014.12.29 17:39
    <비목>의 구절이 참 처량하고 쓸쓸하게 들립니다
  • 어학원쌤 2014.12.29 17:39
    영화 고지전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지나가네요~~잊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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