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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왔다. 일본인들은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지만 일본인들이 "조선에 남겨 준 유산"이라고 나름대로 뿌듯해 했던 여러 발전소는 일단 조선에 남았다. 만주까지 전력을 공급하던 수풍발전소를 위시하여 장전 부전 허천강 유역의 수력 발전소도 건재했다. 


문제는 이 거의 모든 발전 설비가 38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의 총 전력설비는 172만2천KW로 그 88.5%가 북한지역에서 생산됐던 것이다. 38선 이남은 북한의 전기에 의지하여 가정용, 공업용 전기를 충당하는 형편이었다.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여 38선 이남과 이북을 장악하고 분단이 가시화됐을 때 남한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걱정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전기였다. 1946년 3월 9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38 이북에는 천연적 자원의 하나로서 수력으로 운영되는 세계적 댐 압록강 수풍 수력 전기를 위시하여 다수의 전력이 발전되고 있다.... 이 전력을 받아들여 지금 남선은 주로 화학 공업의 동력에 사용하고 있는데 앞으로 이것이 발전 정지 상태에 이른다면 남선의 공업은 비참한 광경에 이를 것이며 또 중요 생산 공장에 사용하기 위하여 이북으로부터 석탄이 하루 13화차씩 보내오던 것이 8.15 이후에는 단절되고 말았다. (…) 현재 남선에는 약 800개소의 공장이 있는데 그중 중요 화학 계통의 공장이 약 250개소이나 지금 일을 계속하고 있는 공장은 약 100개소밖에 안 된다. 이것도 앞으로 전력과 석탄의 동력이 없어지는 때에는 조선의 생산 공업은 전면적으로 파멸에 빠지고 말 것이다."


<1950년대 공장의 모습 / 출처 : www.europa.com>


사실상 남한의 발전 상황은 열악했고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1947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남조선에는 현재 수력 발전소가 4개소이고 화력 발전소로 2개소가 있을 뿐이다. 수력발전소의 발전역량은 4만5000 킬로와트이나 현재는 부속품 등의 불비로 수량이 풍부한 하절에는 최고 발전량 3만2000 킬로와트 수량이 부족한 동절에는 그 역량의 절반도 못 되는 약 2만 킬로와트를 발전하고 있는 형편이다. (…)"


그나마 화력발전소 두 곳 가운데 당인리 발전소는 기사 작성 당시 불능 상태에 있었고 영월 화력발전소만이 겨우 2만 7천 킬로와트를 생산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북쪽의 전기를 얻어 써야 했던 남쪽은 상무부장이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1945년 8월 16일부터 1947년 5월 31일까지 사이의 사용 전량에 대해서는 1킬로와트당 2전5리(1938년 물가 기준)씩 지불하되 현금 지불이 아니고 반드시 전력 시설에 속하는 기재로서 지불"한다는 계약을 맺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전력 시설에 속하는 기재라면 일제 부품이나 기계를 제공하는 것이 맞지만 미군정은 그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고 미군정은 소련의 영향 하에 있던 북조선 인민위원회 등을 인정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소련 역시 한반도의 전기 사정을 돌보기에는 너무 탐욕스러웠다. 수풍 발전소에서 독일제 발전기를 뜯어간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일 뿐이다.


<1950년대 영월 화력발전소>


해방은 됐지만 아직도 우리 것은 우리 것이 아니었고 우리 나라는 우리 나라가 아니었다. 1947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민정장관 안재홍과 기자들의 일문일답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도 전기 문제는 기자회견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북조선에서 송전 원료로 오백만불을 청구했다는데 그 대책은 있습니까?" 이때 안재홍 장관은 "아직 모르겠다. 이는 주둔군 사이에 문제일 것이다."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굳어지는 냉전 구도 하에서 남과 북은 점차 서로 다른 나라로 굳어져 갔고 38선은 안내판도 제대로 없는 편의상의 분계선에서 목숨을 걸고 넘어야 하는 적대국간의 국경선으로 변해 갔다. 남과 북을 오가는 거의 모든 교류가 줄어들거나 끊기기 시작했고 '해방된 통일 조선'의 꿈은 멀어져만 갔다. 전기도 마찬가지였다.


 <안재홍 당시 민정장관 / 출처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북에서 보내 주는 전기는 남쪽의 생산과 소비를 만족시키기에는 큰 가뭄의 이슬비처럼 부족했다. 남한의 산업이 '수면 상태'(1948년 3월 17일자 동아일보)에 빠진 가운데 미 군정은 가용 발전소를 총동원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북조선측이 요구한 전기 대금도 제대로 지불되지 않고 고의적이건 우발적이건 북의 송전 중단도 가끔 일어나는 상황에서 정치적 이슈가 결부됐다. 이른바 38선 이남에서의 단독 정부 수립 움직임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미소공동위원회도 불발로 끝나고 북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 정권이 태동하고 있었고 남에서도 단독 정부라도 수립하자는 의견이 세를 더해 갔다. 급기야 UN 한국 위원단의 입북을 소련이 거부하면서 남한은 단독 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수립한다는 정치 일정을 수립했다. 그 선거일이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였다.


5월 10일을 맞이하는 1948년 봄은 끔찍했다. 각지에서 단독 선거와 분단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제주도에서는 남로당 세력의 봉기로 4.3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정은 좌익의 저항을 강경 진압하는 한편 5월 10일의 남한 내 총선 일정을 굳건하게 밀어부쳤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 / 출처 : 네이버 영화>


1948년 5월 9일자 동아일보는 총선일 이전의 비상 경계령을 보도하는 가운데 북측의 반응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북조선 인민위원회 산업국장 문문화씨는 미국이 전력 문제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고수하는 한 송전 중단을 고려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표면상으로는 전력 대금에 대한 요구였지만 이미 전기는 북측의 정치적 무기가 돼 가고 있었다. 마침내 1948년 역사적인 5.10총선이 치러진 나흘 뒤 북조선은 송전중단을 결행한다. 2013년 조선일보는 1947년에서 1950년사이 조선전업 신기조 급전과장의 일기를 입수해 보도했는데 여기서 신 과장은 1948년 5월 14일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以北(이북)에서 各(각) 送電線(송전선) 遮斷(차단)함. 円滑(원활·圓滑의 일본식 한자 표기)한 解決(해결)이 있기 前(전)까지는 送電不能(송전불능)"


북이 갑자기 전기를 끊자 남한 천지는 호롱불이 일렁이는 암흑천지가 돼 버렸다. 그나마 돌아가던 남한 내 공장 가동률은 10~20%로 떨어졌다. 또 그 시기는 하필이면 한창 농촌의 모내기철이었다. 전력 부족으로 펌프를 돌릴 수 없게 되자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속출했다. 전년 대비 55만 석이나 수확이 모자랐다. 


<서울시청 앞 전차 / 출처 : 서울정보소통광장>


각지의 전차 운행도 대폭 축소됐고 당황하 미군정은 발전함(發電艦 )을 불러들여 급한 불을 끄려 했다. 2만kw급 자코나함은 인천항으로, 6,500 kw급 엘렉트라함은 부산항으로 들어왔지만 타는 단전의 아픔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군정은 소련군 사령관에게 송전 재개를 요구했으나 소련군은 이렇게 대답할 따름이었다. “이번 단전은 남조선 선거와는 일절 관계가 없으며 할 말이 있으면 북조선 인민위원회에 하시오.” 북한으로부터의 송전은 그것으로 영영 이별이었다. 국가 수립 이전에 전기부터 분단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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