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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2 한성의 값비싼 쇠당나귀와 가로등

 

 

< 한성전기회사 신문광고 출처 : 한국영상자료원 >

 

 

1887년 조선 땅에 전깃불이 처음으로 밝혀진 이후 전기라는 마법(?)은 아주 느린 속도로 은자의 왕국 조선에 퍼져 나갔다. 첫 전등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발전기를 돌리다가 경복궁 향원의 물고기들도 떼죽음을 당했고 여러 품도 많이 들어가 건달불이라는 악명을 얻었고 급기야 미국인 기술자가 조선인 조수의 오발 사고로 죽는 지경까지 당했던 것이다. 궁궐에 항구적으로 전등이 켜진 것은 조선의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1900) 덕수궁에서였다. 이걸 주도적으로 설치한 것이 한성전기회사라는 곳이었다.

 

한성전기회사는 18981월 김두승(金斗昇)과 이근배(李根培)가 황실에 청원하여 설립한 한국 최초의 전기회사이다. 사장에 이채연(李采淵)이 취임했지만 사실상 고종 황제를 비롯한 권력층이 주도한 근대화 정책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기술도 부족하고 운영 능력도 미진했던 대한제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게 됐고 어영부영 회사는 미국인 콜브란의 손에 넘어갔다. 콜브란의 한성전기회사가 일차적으로 당시 구한국 사람들에게 선보인 것은 전차(電車)였다. 189812월 홍릉에서 서대문 사이의 단선궤도가 완성된 것이다.

 

 

< 한성전기회사의 전기철도 출처 : 한국영상자료원 >

 

 

홍릉이라면 명성황후의 능이다. 즉 고종 황제가 아내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용이하게 모신다는 명분을 지닌 노선이었고 황실의 투자도 받았다. 이후 전차는 용산- 종로 구간에도 다니면서 서울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을 잡아끌게 된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교토에 이은 두 번째 전차였다.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 하나는 독보적인 한국 사람들은 이 진기한 구경을 놓치지 않았다. 일 작파하고 전차만 타고 다닌 사람도 있었고 지방에서 꾸역꾸역 올라와 전차를 구경하고는 빈털터리가 돼 낭패를 본 이들도 많았다.

 

문제는 개통 며칠 뒤에 발생한다 , 종로 2가쯤에서 한 아이가 전차에 치어 죽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달려들었고 시민들이 합세했다. 전차를 달리게 하는 전선이 하늘을 말려 버려 가뭄이 심해졌다는 속설이 퍼진데다 인명을 해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비싼 전차값 때문에 언감생심 타 보지도 못하는 서민들의 위화감 폭발이 겹쳐진 결과였다. “쇠당나귀를 부숴 버려라!” 차장은 겨우 도망갔지만 전차는 그예 불타 부서지고 말았다. 성난 군중이 동대문 근처에 있던 한성전기회사까지 몰려갔지만 총으로 무장한 콜브란 이하 직원들이 군중을 제지했고 한국 군대가 출동하면서 일단 상황은 마무리됐다. 이후 일본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운전수들은 권총의 소지, 피해보상금의 은행 예치 등을 요구했지만 콜브란은 이를 거절했고 일본인들은 죄다 철수해 버렸다.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전차는 다니지 못했고 미국인들을 수배하여 전차운전에 투입한 뒤에야 정상화됐다.

 

밝아지는 서울의 길

 

세월이 가고 쇠당나귀에 대한 편견도 사라지면서 전차는 점차 서울 시민에게 친숙한 존재가 돼 간다. 노선도 서대문- 청량리, 을지로, 남대문 등으로 확대되고 요금도 점차 저렴해져서 초기와는 달리 서민들도 전차를 타고 서울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1905년을 넘어서면서 장안의 백성들과 차츰 가까워졌다. 전차의 등장과 더불어 정거장 주변에 처음으로 중인환시(衆人環視)의 길거리에 전등이 설치되게 된다. 1900410일 종로네거리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 가로등이 그것이었다. 우리가 전기의 날로 기념하는 날이 바로 이 410일이다.

 

 

< 전등이 설치된 진고개 출처 : KEPCO 전기박물관 >

 

 

20세기에 접어들고 서울에 일본인 등 외국인들이 대규모로 거주하게 되면서 전기의 보급은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1901년에는 오늘날의 충무로에 해당하는 진고개에 밀집해 있던 일본인 거리에 무려 600개의 민간용 전등이 설치돼 점등식을 가진다. 여기에는 조금 슬픈 사연이 도사리고 있다. 당시 서울은 밤이 되면 칠흑 같은 어둠에 싸였고 치안 역시 불안했다. 한성판윤, 즉 서울 시장은 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장명등을 상점마다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 관리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진고개의 일본인 거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 지역은 조선인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남산골 샌님들은 일본인들의 농간에 집과 땅을 빼앗기기 일쑤였고 살던 터전을 빼앗긴 조선인들도 이를 갈았다.

 

어둠 속에서 어느 돌멩이에 뒤통수가 깨질 줄 몰랐던 일본인들은 가로등을 도입할 것을 결정했고 대규모 가로등이 진고개 일대에 세워졌던 것이다. 한성전기회사가 전등출장소를 둘만큼 일거리가 많았다. 일거리가 많았던 것은 조선인들 탓도 있었다. 일본인들을 미워하는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의 거리를 대낮같이 밝혀 주는 전등을 가만 놔 두지 않았던 것이다. 툭하면 전구알이 부서져 나가고 전선 줄이 끊겼다.

 

 

< 전차가 지나는 종로거리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

 

 

그러나 이미 서울 거리는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해만 지면 어둠에 묻히고 어둠 속을 돌아다니는 일조차 대단한 수고로움을 필요로 했던 시대는 바야흐로 거하고 대낮같은 전등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점차 사람들은 밤에도 활개를 치고 다니기 시작했다. 당장 술을 먹어도 날 저물면 집에 갈 궁리를 하던 시절로부터 한결 여유로워졌고 술 취한 채 종로를 가로지르지 않고도 편안히 전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상점도 늦게까지 문을 열었고 통행인들도 부쩍 늘었다.

 

한편 격동의 역사는 한반도를 뒤엎고 있었다.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한국을 집어삼킬 태세에 들어갔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한국에서 미국 공사관은 가장 먼저 방을 뺐다. 이는 한국의 전기사업을 주도적으로 해 온 미국인 콜브란의 입지를 좁히는 일이었다. 일찌감치 한성전기회사를 정리하려다가 고종 황제 이하 한국인들의 반발에 부딪쳐 거액을 투자받고 한미전기회사로 전환했던 콜브란은 1909년 일본 통감부와의 협상 끝에 자신의 모든 권리와 회사를 일본측에 넘긴다.

 

매각대금은 120만 엔으로 하되 지불방법은 제 1차 연도에 70만 엔, 잔금 50만 엔 가운데 10만 엔은 1910131일에, 나머지 40만 엔은 19101월 이후 4년 동안 4회에 걸쳐 분할지불하며, 미화 사채 50만 엔은 매수자가 승계한다는 조건이었다. 1909623일에 쌍방이 계약문안을 작성하고 24일에 계약서에 조인하였다. 그리고 계약에 의한 한미전기회사의 전 재산에 대한 인계인수는 190989일에 완료되었다.” (전기신문 제 1306호 중) 한미전기회사는 고종 황제 이하 한국과의 합작회사였건만 콜브란은 망해 가는 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사업가가 아니었다. 콜브란은 고종에게 일언반구 해명과 사과 없이 계약을 끝맺고는 잽싸게 한국을 떠나 버렸다. 그것으로 건청궁에 처음으로 불을 밝힌 이래 자력으로 전기를 도입하고 이용해 보려던 노력 또한 무위로 돌아갔고 전기 또한 일제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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