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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를 침공했다. 이른바 만주사변이다. 1920년대 후반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일본제국의 생명선(生命線)이라 표현하고 있었다.우선 조선의 안정적 통치를 위해서도 일본에 만주 지역의 의미는 절대적이었다. 


관동군 참모였던 이타가키(板垣征四郞)는 "만몽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참된 조선통치는 기하기 어렵다"고 보았고 조선군(조선주둔 일본군) 참모 가미다(神田正種)는 일제 강점기 최대의 학생운동인 광주학생운동 등으로 험악해진 조선정세의 안정을 위해서는 일본의 무력을 과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1차대전 때 독일이 자원 부족으로 패배하는 것을 목도한 본 군부는 자원부터 식량까지 자급자족할 수 있고 그를 통해 총체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보유하는 '제국'을 꿈꾸었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하여 만주는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던 것이다.


<만주에 주둔하던 일제 관동군 / 출처 : http://blog.163.com/kangzhan>


공산당 토벌에 집중하고 있던 중국의 권력자 장개석은 만주 지역의 군벌 장학량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명령했고 그가 이끄는 동북군(東北軍)은 근거지 만주를 잃어버린 채 공산당 토벌에 진력해야 했다. 동북3성을 장악한 일본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를 끌어들여 일본의 괴뢰국이라 할 만주국을 세웠다. 


국제연맹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만주국 인정을 거부하자 국제연맹을 탈퇴해 버릴만큼, 일본의 만주에 대한 집착은 컸다. 만주국의 주권자는 형식적으로는 선통제 부의였지만 그 본질은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국가원수는 선통제 부의의 남자 후손이 잇게 돼 있었지만 아들이 없을 경우 일본 천황이 지명하게 돼 있었고 나라의 실권은 만주 제국 주차 일본 제국 특명전권대사 겸 관동군 사령관이 쥐고 있었다.


<만주에 주둔하던 일제 관동군 / 출처 : big5.chinanews.com>


일본 관동군은 실질적인 만주의 통치자였고 공무원의 절반이 일본인이었다. 당연히 만주의 산업과 자원도 일본의 것이었다. 일찌기 압록강의 지류를 댐으로 막아 발전을 일으켰던 기술자 구보다 유타카는 압록강 본류를 주목한다. 평안북도 삭주군 수풍면 일대의 압록강 본류를 막는 댐을 건설한다면 이는 부전강 허천강 장진강과는 비교가 안되는 거대한 발전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고 만주와 조선 양쪽 다에 전기를 흘려 보내고도 남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구보다는 기민하게 움직인다. 


"압록강은 한국과 괴뢰 만주국의 국경이기 때문에 조선 총독부와 관동군의 합의가 있어야 했다. 구보다는 우가끼 총독과 고이소구니아끼 조선군 사령관(뒤에 총독), 관동군의 이다가끼 참모장(뒤에 조선군 사령관), 기시노부스께(岸信介) 만주국 실업부차장(뒤에 총리)·시이나(椎名悅三郞) 광공국장(뒤에 외상) 등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만주국과 한국에 양다리를 걸친 회사를 만들고 수풍에서 발전한 전기는 만주와 한국이 갈라 쓰기로 한 것이다." ("총독부 고관들의 그 뒤"- 조갑제) 


1937년 7월 만주로도 만족하지 못한 일본 제국주의는 기어코 중국 본토를 침략하여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조선 북부의 공장들과 만주는 이 전쟁의 전진 기지가 돼야 했고 전력 확보 또한 중요한 관건이었다. 전쟁 시작 석 달 뒤 마침내 압록강변의 대역사 수풍댐 건설이 시작됐다. 형식은 조선과 만주의 합작이었다. '조선 압록강 수력 발전 주식회사'와 '만주 압록강 수력 발전 주식회사'의 공동 출자였던 것이다.


<중일전쟁을 준비하는 일본군 / 출처 : http://history.big5.voc.com.cn/>


4년 가까운 공사는 결코 쉽지 않았다. 5천여명의 노동자들이 엄동설한과 삼복더위를 무릅쓰고 공사에 매진했고 1939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처럼 토사에 묻혀 노동자들이 생명을 잃는 일도 빈번히 일어난 끝에 1941년 8월 5일 수풍댐 1호기가 처음으로 전기를 보내는 데 성공한다. 그 첫 전기는 만주로 들어갔고 조선에는 9월부터 공급되기 시작한다. 


이어 2∼6호기가 추가로 건설됐고 1943년 11월부터는 60만 kW라는 어마어마한 전기를 생산하게 된다. 수풍댐은 높이가 106.4m, 길이 900m로 당시로선 동양 최대 규모였다. 지금도 한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댐으로 남아 있다. 이 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 수풍호만 해도 저수량 116억 t에 수면 면적 3458km², 호수 둘레 1074.4km에 달하는 매머드 호수였으니 그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해방 무렵 발전설비상황을 보면 수력은 부전강발전소 20만kW, 장진강 33.4만kW, 부녕수력 2.9만kW, 허천강 35.5만kW, 수풍 54만kW, 한강화천발전소 5.4만kW이고 화력은 영월화력발전소 10만kW, 당인리화력발전소 2.3만kW로서 終戰 당시 조선의 발전설비는 최대출력 172만kW에 가능 발전량은 114억kWh에 달하고 있었다. (일제말 전시하 전력 통제 정책- 김경림)



<압록강 / www.epochtimes.com>


그러나 이 전기의 혜택은 조선인들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산업과 군수 지원을 위해 할애되고 있었다. 즉 군수 공장, 광산 등에 공급되는 특약공급 전력량이 90.9%였고 가정용 전력량은 0.7%에 불과했던 것이다. 구보다 유타카는 자신은 조선에 뭔가를 남겨 주고 왔다고 뿌듯해했지만 실상 수풍댐은 철저히 일본 제국주의의 구미와 이익에 맞게 건설됐고 사용됐다. 


해방이 왔다. 그러나 해방은 분단과 함께 왔다. 분단은 모든 것을 갈라 놓았다. 남쪽의 농업과 북쪽의 광공업 지대로 특화돼 서로에게 상호 보완 작용을 하고 있던 남과 북의 생활 패턴에도 심대한 변화가 찾아왔다. 동양 최대의 댐 수풍댐에도 분단의 아픔은 불길한 발걸음으로 찾아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1946년 3월 9일자 동아일보는 그 불길함을 구구절절 토로하고 있다. "삼팔 이북에는 천연적 자원의 하나로서 수력으로 운영되는 세계적 댐 압록강 수풍 수력 전기를 위시하여 다수의 전력이 발전되고 있다. 이북의 총발전량은 실로 일백팔십만 개소(킬로와트로 추정)인데 그 중 이남으로 보내는 발전량이 7만5천개이다. 이 전력을 받아들여 남조선은 주로 화학 공업의 동력에 사용하고 있는데 앞으로 이것이 발전 정지 상태에 이른다면 남선의 공업은 비참한 광경에 이를 것이며..." 그리고 이 우려는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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