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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결을 만난 영화 이야기


가을은 초인종을 누르며 온다. 자연스레 옷가지들로 생활 속에 틈입하는 여느 계절과 달리 가을은 쾌(快)한 바람과 산들의 색을 선물로 들고 찾아와 자신을 반갑게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게만 그 특유의 분위기를 허락한다. 그런 점에서 가을은 '좋은 영화'를 닮았다.


유사 무리들이 '제작비'나 '연말'이라는 말을 앞세워 유혹하며 만나기 전부터 설렘을 강요할 때, 좋은 영화와 가을은 그저 가만히 삶의 곡선을 다시 보게 한다. 지키려 애쓰다 포기해버린 영감들을 떠올리게 하고, 작정한 듯 희로애락 중 어느 하나를 장전해 발사하지도 않는다. 러닝타임이 짧다는 점도 비슷하다. 짧은 가을의 상영시간이 끝나기 전에 지나온 계절의 굴곡을 재확인하게 할 '좋은 영화' 몇 편을 만나보자.


1.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 Davis, 2013 / 조엘 코엔, 에단 코엔)


<출처 : 네이버 영화>


코엔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향긋한 월남쌈을 떠올리게 한다. 괜한 상술 없이도 특유의 싱그러운 맛을 내는 점이 그렇다. 예술가 특유의 고뇌, 작품에 대한 신비화 따위는 코엔 형제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닌듯 하다. 속이 훤히 보이는 월남쌈처럼 등장인물의 과거와 미래를 예측 가능하지만 관습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는 점도 형제를 신뢰하게 만든다.  


파트너의 자살로 홀로 남은 주인공 르윈 데이비스(오스카 아이작 분)는 지인의 집을 전전하며 카페에서 푼돈을 벌어 생활하는 무명가수다. 그러나 르윈은 배고픈 예술가의 얄팍한 자존심을 지키려 애쓰지 않는다. 자신의 비루한 생활에 지쳐있지만 주변인에게 지게 될 신세에는 놀랍도록 무감각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에게 암담한 현실을 타개할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르윈이 노래하는 카페의 이름은 가스등(Gaslight cafe). 현실을 청산하려면 캠프 파이어의 불꽃같은 의지가 필요해 보이지만, 그는 딱 가스등 불빛만한 재능을 무기삼아 카페에서 오늘도 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인사이드 르윈>은 주인공 르윈 데이비스가 시카고로 오디션을 보러 떠나는 단 7일 남짓의 여정만을 다룬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면 어쩐 일인지 주인공 일상에 포복하고 있는 복되지 못한 면면을 모두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무명 가수가 느끼는 인생의 피로감을 무겁지 않게 변주한 이 로드무비에서 주인공은 하늘이 무너진 처절한 시련이나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위기를 겪지 않는다. 다만 다분히 생활인으로서 일상의 곤란한 상황과 마주할 뿐이며, 그런 상황에 놓인 누구나 그렇듯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도, 면피를 위해 애쓰기도 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렇지 않아도 버거운 르윈의 삶. 영화는 그 속에 고양이 한 마리까지 침투시킨다. 이쯤 되면 보고 있는 관객의 어깨도 무거워질만하지만 <인사이드 르윈>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 하나의 장면이 여기에 숨어있다. 바로 르윈이 기타와 고양이를 힘겹게 양손에 들고 지하철에 오른 순간, 지하철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고양이의 시점으로 잡은 장면이다. 르윈 품에 안긴 미물의 눈으로 바라본 뉴욕 지하철의 풍경은 "나에게도 네트워킹 된 또 다른 1인분의 삶이 더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한다.


르윈이 홀로 통기타를 튕기며 부르는 노래 <Hang me, Oh Hang me> 역시 '적확'하다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주인공의 현실을 대변하며 영화 수미에서 완벽하게 조응한다.


2. 인 디 에어(Up In The Air, 2010 / 제이슨 라이트먼)


<출처 : 네이버 영화>


조지 클루니의 스타성이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인 디 에어>는 그의 매력을 마력으로 바꾸는데 성공한 영화다. '정착'이라는 말을 '안정'의 의미로 쓰는 우리와 달리, <인 디 에어>의 주인공 라이언 빙험(조지 클루니 분)은 집보다 출장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결혼보다는 쿨 한 연애에서 평온함을 느끼는 남자다.


라이언 빙험은 미국 전역의 기업을 돌아다니며 해고 통보를 대신해주는 직업을 갖고 있다. 이 비인간적인 업(業)에 품격이며 철학이 어디 있겠냐마는 조지 클루니는 그 특유의 마력을 뽐내며 우리로 하여금 냉혹한 '해고 전문가'를 사랑하게 만든다. 


해고가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한다면 라이언 빙험은 그 죽음을 통보하고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다. 그런 맥락에서 <인 디 에어>는 영화 역사상 가장 섹시한 저승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기기에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돌이켜 보면 감독인 제이슨 라이트먼은 전작인 주노(JUNO)에서도 '10대 소녀의 임신'이라는 다소 불편한 소재를 유쾌하게 풀어내 한 집단의 불행을 유머 속으로 끌어 들이는데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인 디 에어>에서도 그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영화는 2000년대 말 구조조정 바람이 불던 미국의 위기 한복판을 질주하면서도 시종 재치있는 연출을 포기하지 않는다. 특히 해고 통보를 받은 가장이 복수를 하기 위해 회사의 중요 문서를 파기하고, 직원들이 마실 커피에 락스를 타는가 하면, 급기야 저격용 총을 장전하는 상상 쇼트는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놀라운 것은 영화 속에서 해고 통보를 받고 갖가지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모두 전문 배우가 아닌, 실직의 아픔을 실제로 겪은 일반인들이라는 점이다. 


감독 제이슨 라이트먼은 이 장면의 유려한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해 디트로이트와 세인트루이스 지역 신문에 광고를 내 '해고 통보 순간에 느꼈던 감정'을 연기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조조정 대상자들의 진솔한 반응이 담긴 이 장면은 <인 디 에어>의 형식과 톤을 그 자체로 완성해버렸다는 느낌을 준다.


아울러 유목민의 삶을 꿈꾸는 라이언 빙험이 주변인들과 주고받는 인생 핑퐁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는지 지켜보는 것도 이 영화를 즐기는 괜찮은 방법이다.


3. 북촌방향 (The Day He Arrives / 홍상수)


<출처 : 네이버 영화>


적어도 내게 홍상수는 영화계의 '박수무당'처럼 보인다. 비단 그의 영화를 본 후 느끼는 형언하기 힘든 마법 같은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우리는 늘 낯익은 배우들을 보게 되는데, 한결같이 그들은 스스로의 필모그래피 속 어디에서도 선보이지 않았던 톤으로 연기를 한다. 


<북촌방향>에서도 홍상수 감독의 이러한 영화적 염력(念力)은 계속된다. 영화감독 성준(유준상 분)은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와 선배 영호(김상중 분)를 만나러 북촌으로 향한다. 그러나 영호는 만나지 못하고 과거에 알았던 다른 이들과의 만남이 반복되는데, 이 특별할 것 없는 지인들과의 조우에 홍상수가 곁들이는 신비로움은 영화라는 매체가 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깊이를 보여준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성준의 과거와 현재가 기이하게 맞물려 벌어지는 며칠간의 서울 여정은 만남과 실수, 이별 등 갖가지 감정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성준이 우연히 영화감독 지망생들과 술자리를 갖고 취해 고성방가 하는 장면은 영화 후반부와 절묘하게 손을 잡고 주인공을 비웃고 있다.


더불어 러닝타임 내내 펼쳐지는 흑백의 화면은 시간을 변주하는 <북촌방향>의 핵심과도 포개어지며 홍상수라는 예술가가 얼마나 예민한 감각을 동원해 손목시계를 관찰할지 보여주는 듯하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다른 모든 예술처럼 영화는 우리가 가늠하지 못하는 영역의 일들을 다룰 수 없다. 다만 누군가에게 영화는 어지럽게 뿌려 놓은 일상들을 낯선 시선으로 보게 하며 기대치 못했던 동기부여가 된다.


꼭 1년만의 다시 만난 9월, 서너장 남은 달력을 모두 넘기기 전에 좋은 영화로 공감각적 리프레싱을 즐겨보는 것도 가을을 맞는 방법 중 하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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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이창민 2014.09.03 10:04
    북촌방향 보고싶었는데 못본 영화 ㅜㅜㅜㅜ
  • BlogIcon 한국전력 2014.09.03 17:50 신고
    이창민님~북촌방향은 기대하셔도 좋은 영화!
    보시면 감상평 남겨주시나요?^^
  • BlogIcon 김미향 2014.09.03 10:12
    멋있네 내칭구 :)
  • 하야호 2014.09.03 11:32
    영화보다 글이 더 재미있네
  • BlogIcon 한국전력 2014.09.03 17:51 신고
    하야호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영화도 아주 아주 재미있답니다!
  • 김민정 2014.09.03 16:54
    글이 너무 좋아요 !! 인사이드르윈 보고싶었는데 이참에 봐야징
  • BlogIcon 한국전력 2014.09.03 17:52 신고
    김민정님 감사합니다! 영화 OST도 들어보세요^^
  • 슬슬 2014.09.03 16:56
    가을은 '좋은 영화'를 닮았다. 이표현 너무 좋아요 ㅠㅠㅠㅠ 여기 나온 영화 다 보고싶게 만드는 좋은글 잘보고가요 : )
  • BlogIcon 한국전력 2014.09.03 17:53 신고
    슬슬님 감사합니다! '좋은 영화' 많이 보시고 가을도 건강하게 나시기를 바랍니다^^
  • 김경오 2014.09.03 17:12
    이 글을 읽으니 나도 빨리 가을과 조우하고 싶어졌다 ♥
  • BlogIcon 한국전력 2014.09.03 17:53 신고
    김경오님 감사합니다^^ 가을과 조우하시면 안부도 전해주세요!
  • 안상준 2014.09.03 17:23
    마치 영화 전문 잡지를 읽는 느낌이었어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인 디 에어> 라는 영화는 몰랐던 영화인데 이 글을 보니 꼭 보고싶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BlogIcon 한국전력 2014.09.03 17:49 신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과 정보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BlogIcon her 2014.09.03 20:23
    글만으로도 영화를 본 것 같이 좋네요 ! 가을이 끝나기 전 꼭 봐야겠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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