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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주화의 이 피다

신촌 이한열 기념관 방문기


 

 ⓒ 이한열 기념관

 


호헌 철폐! 독재 타도!”

 

31년 전 푸르렀던 6,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200만 명이 모여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호헌 철폐! 독재 타도! 도대체 무슨 외침이었을까요? 이 당시 한국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 이한열 기념관




이 사건의 발단은 1987114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조사 참고인으로 소환했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고문 끝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요. 당시 경찰은 이 사실을 축소·은폐하고 시신을 화장하려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1월 15일 오전, <중앙일보신성호 기자가 취재 도중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후 중앙일보 사회면에 2단짜리 기사로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을 최초로 보도했죠. 정부는 중앙일보 측에 '오보'라며 압박을 가했지만, 중앙일보는 '우리는 사실을 확인하고 썼다'며 버텼습니다. 이후 서울에 나와있던 AP, AFP 등의 외신이 중앙일보를 인용해 이 사건을 전세계에 알렸죠. 


이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박종철 군의 부검을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원래 경찰은 14일 밤, 사건 은폐를 위해 시체를 화장할 계획이었는데요. 공안부 최환 부장검사가 시체보존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박종철 군의 시신을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할 수 있었는데요.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어있었고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돼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합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법의학사는 외부의 압박에도 사실대로 사인 감정을 합니다

 

박종철 군의 죽음 하루 뒤 저녁, 경찰 치안본부 책임자는 사건의 개요를 발표했습니다.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인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박종철 군을 심문하다가 책상을 하고 치니 하고 쓰러져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이 발표를 듣고 난 뒤 사람들은 사실을 축소·은폐하려는 경찰에 반발하고 진실을 요구했습니다. 언론사들 역시 이에 동참하여, 으로 관련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그려낸 영화 '1987' 포스터





한편 413일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원하는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대통령 간선제인 현행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호헌(護憲) 조치를 선포합니다. 그러자 시민들은 분노하고 분노는 민주화의 물결이 돼 출렁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헌을 철폐하고 독재를 타도하자 부르짖으며 길거리로 향했습니다.

 

518일 김승훈 신부로부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고, 527일 여당·종교계·재야단체 등 2,191명 참여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출범합니다. 그리고 군부독재정권에 대해 저항합니다.



 

 ⓒ 이한열 기념관


 ⓒ 이한열 기념관


 

시위가 한창 이어지던 69. 연세대 학생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시위 중 전경들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집니다. 원래 최루탄은 상공을 향해 45도 각도로 발사되어야 하지만 시민들을 향해 직격 발포가 계속 있어왔고, 이런 비인권적인 처사에 시민들은 분노합니다.

 


 ⓒ 이한열 기념관



610,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던 날. 오후 6시를 시작으로 전국 18개 도시의 시민 24여만 명이 참여한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됩니다. 이후 5일간의 명동성당 농성 투쟁이 이어졌으며, 618최루탄추방대회에는 학생들과 넥타이부대까지 참여해 150여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626일 전국 4개 도시와 4개 군 2백만여 명이 참여한 국민평화대행진을 통해 629일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인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 특별선언을 하면서 마침내 독재의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헌법 제671항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 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


 



 ⓒ 이한열 기념관



그리고 75, 이한열 열사가 사망했습니다. 나흘 뒤인 79, 시민 100만 명이 서울광장에 모여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됐지요.


 

이렇게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과 희생이 있었는데요. 6월이 다 가기 전, 민주항쟁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한 번쯤 돌아봤으면 합니다.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이한열 기념관을 가다


 

 ⓒ 이요한

 


이한열 기념관은 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가 있는 신촌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에는 이한열 열사의 유품을 비롯해 6월 민주항쟁의 기록도 보존·연구하고 있는데요.

 


 ⓒ 이요한



기념관 건물 3층에는 6월 민주항쟁에 대한 전시가 있고, 4층에서는 영화 1987 소품전을 볼 수 있습니다.

 


'쓰러지는 이한열 군' ⓒ 이요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 직격탄을 맞고 난 후 찍힌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사진이죠. 이 사진을 보며, 군부독재정권의 잔혹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이요한


 

6월 민주항쟁을 기록한 사진들이 계속해서 전시되어 있습니다.

 



ⓒ 이요한




6월 항쟁의 시작 다음 날이었던 6월 11일 중앙일보 발행본입니다. 1면에 쓰러지는 이한열 군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실려있습니다.

 

 


ⓒ 이요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질 때 입고 있던 옷과 신발입니다. 양쪽 신발 모두 벗겨져 나갔는데, 그 일부를 어느 여학생이 주워 가족에게 전달했다는데요. 옷과 신발은 이한열 열사의 둘째 누나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2005년에 기증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 거리에 섰다 

                                                            - 이한열 열사

 

이한열 기념관은 평일 오전 10시부터 17시까지 운영되며 주말에는 문을 닫습니다.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그의 희생을 다시 한번 기억해주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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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티즌 2018.07.03 14:13
    한전 블로그 기사에서 정치성 다분한 글을 보는건 좀 그렇군요..
  • ??? 2018.10.06 17:50
    정치성 다분한 글이라뇨...?
    독재에 맞서 시민들이 싸운 역사적 사실이 정치성 다분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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