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황석영의 대하 소설 <장길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낭림산맥 일대와 북도의 백두산에서 시작되는 마천령 산맥, 그리고 그 두 산맥 사이의 아득령 너머 허천강 장진강 부전강 일대에는 아무도 발을 디뎌보지 못한 원시림과 심심산곡이 쌨는데 농사짓고 화전갈이할 땅이며 덫을 놓고 함정을 파는 사냥터며 주인이 말한 것과 같은 금과 은의 잠채터가 수없이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이곳 일대는 실로 관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광대무변의 새로운 고장이었다." 


관(官)의 힘조차 미치지 못하는 아득하게 험한 땅.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기 때문에 되레 사람들에게 허락할 많은 보물을 숨기고 있던 지역이 바로 개마고원 일대, 그리고 그를 가로질러 압록강을 향해 흐르는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 일대였다.


<출처 : 위키백과>


아주 험한 경우에 대응하여 쓰는 우리 말 관용어로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운운하는 말이 쓰이는데 이 삼수와 갑산이 바로 이 지역에 해당한다. 갑산(甲山)은 갑옷같은 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해서 갑산이요 삼수(三水)는 바로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의 세 물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그토록 외지고 궁벽진, 귀양도 삼수갑산으로 하라고 하면 그저 맥놓고 울었을만큼 험준한 고장 삼수와 갑산은 일제 강점기 그야말로 상전벽해 경천동지의 전기(轉機)를 맞게 된다. 바로 이 고장에 대규모 수력 발전소가 들어선 것이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경영하면서 남쪽의 농업 지대에서는 쌀이나 기타 곡물들을 뜯어갔지만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장차 만주로 진출할 교두보가 될 북한 지역에는 중화학공업을 주로 육성했다. 중화학 공업에 가장 필요불가결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전기였다. 특히 함경남도 흥남 일원에 조성된 비료공업단지는 그야말로 전기 먹는 하마였다. 이 공장에 들어가는 전기를 어디서 끌어올 것인가. 일제가 눈독을 들인 것이 압록강 지류 삼수, 즉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물을 이용한 수력발전이었다.


최초로 일제가 건설을 감행한 것은 부전강댐이었다. 1930년 완공된 부전강 수력 발전소는 최초의 국내 유역변경식 발전소로 역사에 기록된다. 유역변경식 발전소는 흐르는 강을 댐을 막은 다음 경사가 큰쪽으로 물길을 바꾸어서 그 낙차를 이용해 전기를 일으키는 발전 양식이다. 부전강 상류 계곡의 해발 1,200m 지점에 댐을 축조하여 면적 240㎢, 주위 80km의 대저수지(부전호)를 만들고, 그 상류에 분수령 중복을 터널(27.5km)로서 물을 끌어들여 동해 사면에 흐르는 성천강에 낙하하여 낙차를 얻어 전기를 생산해 냈다. 백암산(1,740m) 밑에 있는 송흥리 발전소(해발 580m)는 유효 낙차 707m, 최대 출전력 13만 kW로 그 규모가 당시 동양 제1이라고 한다.


<흥남·부전강 일대의 공업도시 전경 / 출처 : 엔하위키>


오지 중의 오지였던 부전강에는 상전벽해가 일어난다. 일단 고원지대 한복판에 인공호수 부전호가 생겨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한이 "사철 흰눈이 덮인 높은 산과 천연수림이 울창하게 들어선 넓고 깊은 골짜기를 막아 만든 고산지대의 저수지이며..... 진달래가 만발한 호수의 봄풍경과 단풍이 울긋불긋한 가을풍경도 좋지만 바다같이 넓은 호수 물면에 이깔나무 숲의 그림자가 드리워 시원한 고원의 풍치를 더욱 돋구어 주는 여름 경치가 제일"이라며 자랑하는 절경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어 장진강에도 상류에 댐을 쌓고 인근 황초령에 터널을 뚫고 물을 떨어뜨려 수력발전을 (32만 킬로와트) 일으켰고 1940년에는 허천강 발전소 (36만 킬로와트)도 세워졌다. 압록강을 향해 흐르던 풍부한 수량의 세 강은 동양 최대의 전력을 생산하며 원산, 흥남 일대의 공업단지의 전력을 충당했고 초고압선을 활용하여 서울까지도 그 전기를 보냈다. 1930∼40년대 한반도 남북의 전원시설 비율은 15:85로 북한 지역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조선총독부는 송변전 시설을 확충하여 이 전기를 공급했는데 북한에서 온 전기를 중개했던 것이 바로 서울의 수색 변전소였다.


<수색변전소 / 출처 : 위키백과>


한반도의 전기 공급원으로서 이름을 떨친 부전강, 장진강, 허천강 수력 발전소의 역사를 돌아보다 보면 한 사람의 일본인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구보다 유타카. 전 일본공영 회장. 조갑제 기자의 <조선총독부 최후의 인터뷰>에 따르면 구보다는 도쿄 대학 토목과를 졸업하고 일본 내무성에서 관영 공사 감독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식민지 조선의 5만 분의 1지도를 입수하게 되는데 한반도의 북부 개마고원을 관통하는 강들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아 이 지역에 발전소를 세우면 좋겠는데......” 


그는 그 아이디어를 현실화해줄 물주를 찾았고 마침 전기가 아쉽던 일본 질소 비료 사장 노구찌와 배가 맞았다. 노구찌는 세계 굴지의 흥남 비료공장을 세웠고 오늘날 롯데 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 호텔 등 여러 사업체를 경영했는데 식민지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 기업가 가운데에서는 최대 규모의 '재벌'이었다. 그는 2천만엔을 투자하여 구보다 유타카의 꿈과 자신의 이익을 동시에 실현했으며 이후 장진강댐, 허천강댐까지도 손을 댔다. 허천강댐 공사가 발표된 1936년 동아일보 기사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자본과 과학의 거철(拒轍), 함남 처녀지를 정복하다." 거철((拒轍)이란 ‘당랑거철’(螳螂拒轍) , 즉 사마귀가 수레 앞에서 항거한다는 말에서 온 표현이니 ‘자본과 과학’


<조선총독부 / 출처 : 두피디아>

이 얼마나 거대한 자연과 맞서 그들의 목적을 이루었는지를 사뭇 느끼게 한다.

<조선총독부 최후의 인터뷰>에서 구보다 유타카는 기자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날 욕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가 조선에서 그렇게 큰 공사를 벌일 수 있었던 현실, 즉 일제 강점기 자체가 조선인들과 한국인들에게 욕된 나날이었음을 도외시한 말이긴 하지만 그는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자위했다고 한다. "내 유산은 조선에 남아 있다. 조선 민족을 위해 그 유산은 큰 보탬이 될 것이다." 구보다의 가장 큰 ‘유산’은 장진 부전 허천강 외에 더 있었다. 바로 저 유명한 수풍댐이었다.


댓글쓰기 폼
  • SK Hyun 2014.08.27 08:04
    구보다 유타카를 그 누가 욕할 수 있겠는가? 그의 공학도로서의 통찰력과 집념은 당시 동양최대 규모를 넘어 세계수준의 인프라를 만들었고, 그것은 이땅에 남았다. 그의 공학도로서의 위대한 업적이 정치적 판단에 의해 퇴색될 수는 없다.
  • 하야호 2014.08.27 13:45
    역사책에서 배우지못한 재미있는 또 하나의 우리 역사네요
  • BlogIcon 이창민 2014.08.29 11:21
    내 유산은 조선에 남아 있다. 조선 민족을 위해 그 유산은 큰 보탬이 될 것이다...
  • JJ 2014.08.29 11:23
    우와 댐이다 댐
  • 고양이 2014.08.29 11:27
    오 처음알게된 사실이네요 역사는 정말 끝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