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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이 사람 덕분에!


 

우리의 삶은 전기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전기 없이 살 수는 있겠지만, 그로 인한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기를 매일 사용하는 우리들보다 간절하게 전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전기 연구에 평생을 매달렸던 과학자들입니다! 에디슨이나 테슬라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큰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 오늘은 전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앙드레 마리 앙페르(1775~1836)


마침내 행복해지다 - 앙페르의 묘비명

 


앙페르는 근대 전기학의 근본를 이룩한 프랑스의 물리학자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도서관에 파묻혀 살았던 공부벌레라고 합니다. 수학, 과학, 라틴어까지 두루 섭렵한 앙페르는 훗날 학계에서 빛을 발할 영재였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자코뱅 파의 반대에 섰던 아버지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면서, 그는 좌절하게 됩니다.

 

오로지 집안에서 몇 년째 타인들과 관계를 거부한 채 살아가고 있을 무렵 앙페르는 줄리 카롱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줄리 카롱과의 결혼 생활은 그녀가 아들을 낳다가 얻은 병에 의해 사망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아내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앙페르는 인생의 크나큰 시련을 종교적 신념과 학문적 열망으로 해소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 끝에 그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 사이에 인력과 척력이 존재하고, 이를 수학적으로 계산한 앙페르 법칙을 공식화하기에 이릅니다. 당시에 전기와 자기는 철저히 분리해 생각하는게 과학계의 통념이었습니다. 이를 뒤집는 혁명적인 발견을 한 사람인 것이죠.

 

하지만 앙페르의 삶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줄리 카롱이 사망한 뒤 재혼한 아내와는 얼마 못가 이혼했습니다. 여색을 쫓던 아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난폭한 군인이었던 사위에게서 딸을 지키느라 집 안은 쑥대밭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앙페르의 삶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만약 그의 삶에 전기가 없었더라면, 그런 고난을 감당해내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훗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국제 전기협약은 전류의 단위를 앙페르의 이름을 딴 암페어(A)라고 지었습니다.




앙페르의 회로 법칙?

 

전류와 자기장의 관계를 나타내는 앙페르의 법칙은 전류밀도 J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자기장 H에 관련된 것으로 식은 ▽+HJ’입니다. 전자기의 성질에 대한 그의 발견은 고전 전기기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후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은 앙페르의 식과 유도자기장에 대한 식과 합쳐 앙페르-맥스웰 방정식을 완성합니다.



 


샤를 드 쿨롱 (1736~1806)


부모님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과학자

 


쿨롱은 정전기력의 크기를 정량화한 쿨롱의 법칙을 발견한 프랑스 과학자입니다. 쿨롱은 수학에 관심이 많아 과학자가 되길 꿈꿔왔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의사로 키우고 싶어한 어머니의 바람에 과학자의 길을 포기해야 했죠. 부모님이 그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쿨롱은 군사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군에서 건축을 담당하는 장교로 생활하게 됩니다.

 

쿨롱은 군대에서 비로소 과학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쿨롱은 마찰에 관련된 다양한 논문을 제출해 주목을 받습니다. 쿨롱은 1785년부터 1791년 사이에 전기력에 관한 실험을 정리한 논문 일곱편을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합니다. 전기력이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고 전기량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쿨롱의 법칙이 이때 처음으로 공개됐습니다.




쿨롱의 법칙

 

정전기를 가진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서로 끌거나 밀거나 하는 힘의 크기(전기력)은 각각이 가진 정전기의 양(전하량)에 비례하고, 둘 사이 거리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 법칙은 전기기학 발달의 기초가 됐습니다. 또한 쿨롱의 법칙은 전기장뿐 아니라 자기장에서도 적용돼 로렌츠 힘의 법칙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




쿨롱은 전기분야에만 관심이 있었던 과학자는 아니었습니다. 프랑스혁명과 함께 퇴역한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돼 전기 이외의 분야에서도 35편의 논문을 썼습니다. 쿨롱은 훗날 파리대학 총장을 역임할 정도로 과학적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전하량의 단위 쿨롱(coulomb/C)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게오르크 시몬 옴 (1789~1854)


꺾을 수 없는 의지로 옴의 법칙을 지켜내다

 


독일에서 태어난 게오르크 시몬 옴은 아버지를 따라 대장장이 일을 배웠습니다. 16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옴에게 망치 대신 수학자습서를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배려와 일찍이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았던 스승 랭돌프 덕분에 옴은 수학과 과학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학비를 내지 못한 그는 결국 대학에서 퇴학당했습니다. 이후 그는 학교 수학 선생으로 근무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죠. 하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옴의 전기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결국 그는 옴의 법칙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옴의 법칙

 

두 지점의 전위차(전압)는 전류의 세기에 비례하고 저항에 반비례한다는 전압, 전류, 저항 사이의 정량적 관계를 밝힌 것입니다. 옴의 법칙을 수식으로 나타내면, V=IR(V=전압, I=전류, R=저항)이 됩니다. 이 법칙은 앙페르와 함께 전기 이론 연구의 출발점이 된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옴의 법칙은 독일의 학계에서 철저하게 무시받았습니다. 당시 물리학계는 옴의 논문을 해독하기 힘들었고, 전기적 작용이 서로 붙어 있는 입자들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주장은 당시 주류 과학계와 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옴이 지방 고등학교 교사라는 점도 이런 편견에 한 몫했습니다.

 

15년 뒤 1841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의 귀족연합에서 옴에게 코플리상을 수여합니다. 드디어 옴의 법칙은 인정받은 것입니다. 옴의 법칙이 인정받으면서 1852년 옴은 뮌헨대학교의 실험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결국 대학교수라는 그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죠. 하지만 옴은 불과 2년 뒤 185475일에 사망합니다. 그의 이름은 저항의 단위인 (ohm)으로 명명되면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한만춘(1921~1984)


대한민국 전기공학의 시초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한만춘 박사입니다. 한만춘 박사는 1943년 경성제국대학 전기공학과 1회 졸업생입니다. 그리고 5년 뒤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대한민국의 전기공학의 후진양성에 힘쓰게 됩니다. 27살의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었지만 한 박사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하여 전기산업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전후 사정과 맞물려 전기공학자들이 챙겨볼 만한 전기관련 서적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만춘 박사는 이러한 문제점부터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학생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한국식 전기서적들을 출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만춘 박사의 노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수많은 전기공학자들을 육성해 냈고, 전기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한만춘 박사의 또 다른 업적은 전기계산기를 만든 것입니다. 1961년 한만춘 박사는 연세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를 선보였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첫 아날로그 컴퓨터로 우리나라 전기전자공학 수준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입니다.

 

한만춘 박사는 대한민국 과학계를 이끌며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만춘 박사에 대해 잘 모릅니다. 저 역시도 그랬죠. 한만춘 박사를 비롯해 많은 국내 과학자들 덕택에 대한민국 전기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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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전 2017.09.05 21:15
    우리나라 과학자 한만춘님은 처음 들어봤어요! 정말 좋은 정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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